
저널리즘 속 비평과 비평 속 저널리즘
-꽃다운 20대 청춘을 잡지 84권에 바친 한 에디터(저널리스트가 아닌)의 간증
*이 글에는 한국 미술전문지의 입장, <아트인컬처>의 입장, 개인의 입장이 마구 뒤섞여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올해는 비엔날레 개최 시기가 하루 이틀 사이로 두고 있어, 발제문에 지적된 문제점이 더욱 극대화되어 드러났다. 그러나 이번 행사의 예보다 먼저 <아트인컬처>에서 지난 2006년 광주/부산 비엔날레를 다뤘던 방식을 소개하고 싶다. 2006년도 역시 같은 달에 광주/부산 비엔날레가 개막했다. <아트인컬처>는 8월에 ‘Battle of Biennale’를 기획해 사전 방문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점검했고 총감독이 그리고 있는 청사진을 인터뷰로 냈다. 이어서 개막하고 난 후 10월호에는 인상 비평에 지나지 않는 현실을 감안, 현장에 온 미술관계자들의 코멘트와 부산비엔날레 개막 현장에서 라운드테이블을 열어 ‘비엔날레, 말말말’이라는 이름으로 게재했다. 보다 깊이 논의되어야 하는 부분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12월호 ‘비엔날레 후일담’을 통해 비평문을 내보냈다.
이를 기획한 에디터 입장으로는 발제문에서 지적된 문제 중 적어도 ‘시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대안적인 접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힘 빠지게도, 이렇게 다른 시도를 해도 당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역시 편집부의 기획보다는 결국, 비엔날레에 나온 작품과 잡지에 실린 비평가의 글이 관건이라는 결론이 이제서 난다. 세 번에 걸친 특집이었음에도 일언반구도 없었던 2년 전과 달리 이번 비엔날레 특집(글)을 보고 좋았다는 외부의 피드백을 벌써 몇 번째 접했기 때문이다.
이번 해의 광주/부산 비엔날레는 2006년처럼 대대적으로(3번에 걸쳐) 할 만한 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종전처럼 단발성으로 ‘해치우자’ 식이었다. 미술비평가 심상용, 임근준, 하인스 페터의 리뷰를 실었다. 물론 발제문처럼 우선 오프닝에 참여해야 했고, 다녀와서 기획하는 데 시간을 쓰다 보니 필자에게는 글 쓰는 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줄 수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세 필자는 정보와 사유를 기반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 훌륭한 글을 보내왔다.
1. ‘시간’의 싸움-직업으로서의 비평
무엇이건 공을 더 들이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본인의 경우도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비평가, 심지어 전시를 만드는 큐레이터나 작품을 하는 작가들을 봐도 시간을 넉넉하게 줘도 미리 해두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국식’ 빨리빨리 시스템에서나 가능한 건지 몰라도, 우리 잡지도 그렇고 모두 ‘마감 시간’이 닥쳐야만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더욱이 이번 비엔날레 특집 글의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결국 시간이 결과물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데 원론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시 위주로 미술계가 작동한” 당대에, 그것도 이 자리에서 이야기되는 ‘비평’이 ‘현장비평’으로 전제된 것이라면, 월(月) 단위로 나오는 잡지에서 지난 달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에 관한 근본적인 혐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도 젊었을 적 생활을 위해 글을 쓰던 시절을 되짚으며 <빵 굽는 타자기>라는 저서를 내지 않았던가. 여기서 비평도 창작 행위에 속하니까 밥을 짓기 위해서라면 빨리 써내라는 뜻으로 비약하지 말았으면 한다. 단지 평론의 ‘직업’으로서의 측면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잡지가 책을 팔아 사는 작은 기업이듯, “납품기일”을 맞춰야 하는 비평가에게 ‘직업 정신’에 대한 담화를 듣고 싶다.
위의 내용은 ‘직업 윤리’에 관한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지는 부분, 혹은 7년 넘게 잡지를 만들어온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 부분은 바로 한국에서 미술전문지의 쓰임이다. 일간지(이제는 분 단위로 올라오는 인터넷 매체도 있지만)에 비하면 한 달이 늦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월간지에게는 여전히 정보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것은 미술 잡지의 ‘생명줄’인 전시 광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과거 <계간미술>을 보면 광고가 거의 없다. 게다가 3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필자들에게도 충분한 ‘시간’을 준 셈이다. 두꺼운 종이로 곱게 포개져 있는 <계간미술>을 지금 다시 꺼내어 보면 당시 사람들이 부러울 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결국 <계간미술>도 <월간미술>이 되었고, 그것이 현재 한국 미술전문지의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현재 모든 미술전문지들은 홍보의 기능을 하는 프리뷰와 비평의 기능을 하는 리뷰로 나뉘어 구성된다. 이는 미술전문지의 정체성을 정보지냐, 정론지냐 구분짓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아트인컬처>의 경우 2년 전부터 별책 <art와>를 따로 내면서 프리뷰와 뉴스 등 정보물을 모아 놓고 있지만, 잡지 메커니즘 상 본책에서 홍보성이나 정보성을 띠는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전시 리뷰 코너에 실리는 글들마저도 비평가(혹은 현직 큐레이터)에 의한 ‘아는 작가’의 홍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대중매체에서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발제문에서 그려지는 ‘신속성, 정보성, 대중성/깊은 사유, 의미의 통찰, 독창적 글쓰기’와 ‘저널/비평’으로 적대적 대립항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이 든다.
2. ‘공간’의 화해-저널, 비평가, 독자
사석에서 만난 어느 유명한 영화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잡지는 “남이 떨어뜨린 콩고물을 주워 먹는 곳”이란다. 솔직히 일부 맞는 지적이다. 특히 올 하반기처럼, 대형 행사들이 줄을 잇는 상황이라면 기획특집을 구상할 머리보다, 오프닝마다 쫓아다닐 발이 더욱 수고스럽다.
미술잡지가 딛고 있는 땅은 언론계도 아니고 미술계도 아니다. 언론이라고 하면 당연히 ‘특종’이 있어야 마련인데, 미술계에는 이렇다할만한 특종거리가 잘 없다. 설령 신정아 사건, 모 큐레이터의 전시서문 카피 사건, 삼성 사건 같은 이 큰 건이 생겨도 전문지보다는 일간지에서 더욱 신속하게 구석구석 잘 파헤친다. 몰라서 못 내기 보다는 이런저런 상황으로 안 내는 경우가 많다. 잡지 측에서도 기피하지만, ‘구린’ 건수에 대해서는 필자들도 뒷걸음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잡지에서는 논쟁을 좋아한다. 특히 새롭게 생겨나는 잡지일 경우, ‘쎄게’ 보이기 위해 창간 초반에는 선정적이거나 이슈메이킹하는 기사들을 뽑는 것은 참으로 뻔한 풍경이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 점점 리뷰를 위한 리뷰로 채워지고, 작가와 필자만 읽는 잡지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잡지 메커니즘을 살펴보면, “비평가에게 ‘요즘 어떤 전시가 좋은지’를 묻고, 그/녀가 추천하는 전시를 지면에 기사로 쓰는” 방식은 그나마 모범적인 수순이다. 오히려 잡지사 쪽에서 누구나 인정할만한 큰 전시를 짚은 다음, 잘 써줄(원고 마감 기일을 잘 지켜주고, 교열을 많이 안 봐도 될) 필자를 찾아서 청탁하는 식이 주를 이루는 편이다. 여기서 다음 문제로 번지는 것은 이러한 ‘오더 식’의 진행 방식이 결국 비평가로 하여금 수동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류/비주류를 고착화시키는” 판단의 책임은 비평가보다 잡지사(내부의 편집회의)에 있다고 보여지는데, 비교적 작은 집단인 편집회의 안에서도 ‘도발’을 하려면 두세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모두 다른 개성의 에디터가 모여 있을 때 다양성 면에서 이상적인 구성일 수 있으나,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에게로부터 정당성을 이끌어 내고자 할 때 작가의 경력이나 행사의 규모 같은 구체적 이유가 아닌, 비평가의 사유나 예술가의 실천성 같은 추상적 이유를 들어서는 힘들다.
그래서 결국 누구나 인정할만한 ‘적당한, 적절한’ 기사거리를 찾는 것이 안전하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안전하다는 것인가? 우선 한정된 지면에 나오지 못한 다수의 창작자를 향한 알리바이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경력의 작가와 모든 매체에서 주요하게 다룰만한 대형 전시 위주로 편성된다. 사실 이러한 ‘판단의 유예’ 현상에는 과거에 비해 한 전시가 열리기까지 이미 많은 판단의 장치가 개입되는 미술계 시스템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가령 공모전(그에 준하는 큐레이터의 작가 선정 필터)과 문진금, 레지던스 등을 거쳐 선택되었다면 전시 오픈하기 전부터 중요한 전시/작가로 판단 내려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배경지식 없이 실제로 전시된 작품만을 보고 ‘좋다!’고 판단내리는 데에는 역시 용기와 부지런함 등이 필요하다. 결국은 발제문에서 나온 “인정”이라는 것은 저널과 비평가, 그리고 관객의 안일함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p.s. 끝으로 재미있는 현상과 상상
-홀수 해 6월마다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리면, <월간미술>과 <아트인컬처>는 현지 취재에 다녀와서 어김없이 7월에 특집으로 낸다. <아트인컬처>가 창간한 이후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다. 이를 두고 경쟁지의 에디터들끼리는 ‘진검승부’라고 한다.
-저널은 권력화되지만, 에디터는 노예화된다.
-편집권을 인정하지 않는 비평가, 저널의 힘을 이용하는 비평가, 평소 다른 비평가의 글을 읽지 않는 것을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 비평가
-읽기는 싫어하고, 써서 책을 만들어내는 일은 좋아한다. 현재 국내에는 충분히 많은 미술 매체가 존재하지만, “내가 잡지를 내고 만다”는 말을 달고 살거나 실제로 실행해 옮기는 비평가, 큐레이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발제문을 통해 그려본 이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저널은 동인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동인지와 정론지 사이의 그 무엇: 최근 <디자인플럭스>의 진행 방식이나 새로운 형식의 아티스트북
-과소평가된 작가 BEST100
**지난 10월 31일 금요일 2시부터 국민대에서 개최됐던 <2008시각예술포럼-시각예술과 비평의 역할>에서 미술평론가 강수미 발제문(http://blog.empas.com/desumi/31397712)에 대한 질의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