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어 열린 광주, 부산의 비엔날레 프레스 프리뷰에서 쌓인 피로를 풀기도 전에, 기자는 다시 짐가방을 싸야 했다. 목적지는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 베이징올림픽 덕분에 세계의 이목이 한껏 몰려 있던 중국 본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기본 정보부터 부족해 더욱 멀리 느껴지는 곳이다. 국기가 무슨 색인지도 모르고, 대통령(나중에 알고 보니 총통 체제)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대 국제 미술계에서 대만의 위치는 어디이고, 또한 그들은 어떻게 비엔날레라는 국제 미술행사를 그들의 토양에 맞게 번역했을까.

실속파 ‘휴먼 스케일’ 비엔날레
올해로 6회를 맞는 타이페이비엔날레의 감독은 만레이 수(Manray Hsu)와 바시프 코르툰(Basif Kortun)이 공동으로 맡았다. 각각 대만과 터키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이들의 ‘궁합’은 역시나 잘 맞았다. 이들은 그동안 국제 미술계를 온몸으로 겪으며 유럽 혹은 미국으로부터 축적된 콤플렉스와 매너리즘을 동시에 날려버리려는 듯했다.
우선 두 감독이 직접 선정한 참여작가 리스트에서부터 그런 의도가 드러난다. 30명(팀)의 참여작가 중에서 레바논 루마니아 터키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사이프러스 이스라엘 한국 대만 등 동유럽, 중동, 아시아 권역의 출신 작가가 많았으며 상대적으로 미국, 중국은 적었다. 심지어 일본이나 프랑스, 영국처럼 국제 미술계에서 귀족 대접을 받던 나라의 작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국적뿐만 아니라 경력 면에서도 소위 ‘비엔날레 작가’라고 불리는 작가를 선택하지 않은 것 또한 두 감독 간에 사전 협의된 사항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한국에서 참가한 두 작가 역시 타이페이가 첫 비엔날레였다. 참고로 최원준은 만레이 수가 인사미술공간에서 발굴했고, 구민자는 바시프 코르툰이 심포지엄 참석 차 쌈지스페이스에 방문했을 때 섭외됐다고 한다.
비엔날레 취재 일정은 오전의 프레스컨퍼런스부터 시작됐다. 인포데스크로 기자 등록을 하러 갔더니 홍보팀 직원이 보도자료, 프레스카드, 엽서 등이 들어 있는 프레스킷과 함께 작은 종이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열어 보니 샌드위치와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진행된 비엔날레 투어 일정 중 따로 점심시간이 잡혀 있지도 않았다. 간간히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을 틈 타 각자 먹고 싶을 때 먹으면 됐다. 오찬과 리셉션, 파티로 이어지는 먹고 마시고 떠드는 ‘투어’로서의 비엔날레와는 다른 모습에서 기자는 여타의 비엔날레와 다른 분위기를 예감했다.
십여년 전 바시프 코르툰은 캐롤리 테아와의 인터뷰에서 “여행객처럼 한 전시에서 다른 전시로 뛰어 다니고, 같은 사람들을 보는 전문가들에게 비엔날레는 만만한 경기장이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다”(《큐레이터는 세상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김현진 옮김, 원제 foci)면서, 비엔날레 신드롬을 지적한 바 있다. 단지 넉넉지 않은 비엔날레의 접대비용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코르툰의 지시로 도시락을 싸게 된 것은 아닐까? 의외로 해외에서 초대된 큐레이터들은 행사 전반에 디테일하게 관여하는 편이다. 언론사에게 참여작가 당 단 한 컷의 이미지만 허락했거나, 어느 사진작가에게는 액자까지 다시 해오라며 간섭했던 광주의 오쿠이 엔위러 감독을 보라.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도 대만이 중국 본토에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상하이비엔날레나 광저우트리엔날레를 들려온 미국 기자에게 듣자니 오프닝에 온 해외 기자단이나 미술관계자들의 숫자도 현저히 적었다고 했다. 물론 광주, 부산과도 비할 바가 못 됐다. 다시 말해 ‘잔치집’ 분위기가 덜 났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 비엔날레의 들뜬 분위기에 쩔어 있던 기자에게, 소박하면서도 실속 있는 타이페이비엔날레는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감독의 인맥을 자랑하는 듯한 ‘셀러브리티’ 대신 참여작가들이 대부분 프레스오프닝에 참석했다. 감독, 참여작가, 기자 모두가 함께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하나하나 둘러봤다. 또한 두 감독이 번갈아가면서 작가 및 작품 설명을 했고, 출품작가의 인터뷰와 관객(다른 참여작가와 기자)의 코멘트도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너무나도 ‘모범적인’ 모습에 처음에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렇게 심도 있는 투어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행사 규모가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부터 타이페이비엔날레가 ‘휴먼 스케일의 비엔날레’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관람자가 현대미술의 난해함에 매몰되지 않고 섬세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던 말의 의미를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예술 행위
광주와 마찬가지로 타이페이비엔날레의 주제는 없었지만 ‘주제 없음’을 통해 비엔날레 전시 방법론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제스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제 없이도 광주가 탈식민주의를 암시했다면, 타이페이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양태들을 주목했다. 미술관 로비에서부터 ‘인터내셔널 마니페스토’를 외치는 강렬한 ‘테러 액션’으로 시작했다. 2005년 조지 부시가 아르헨티나에 방문했을 때 처음 조직된 인터내셔널 에러리스타(International Errorista)라는 이 그룹은 구호, 삐라, 깃발 등 테러리스트의 외형을 취함으로써 자본 시스템과 권력 구조에 균열을 일으킨다.
마치 뱅크시를 연상시키는 그래피티 작업을 하는 대만작가 비브라더(Bbrother)는 미술관 한 벽면을 군인 보호색(일명 개구리복 패턴)으로 가득 채웠다. 또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드릭 부차난(Roderick Buchanan)의 작품 <Here I am>은 군악부대의 연주 연습 모습을 다소 유희적으로 비디오로 보여줬다. 전시장 곳곳에 산발되어 있었지만, 군사적 모티프를 삼은 작품들의 반복적 배치는 자본주의 일상 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공)권력을 고발하는 듯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작가 최원준이 참여한 것은 일견 필연으로 보인다. 여의도공원 아래 아직도 원형의 모습에 가깝게 남아 있는 대형 벙커를 찍은  <Un finished_Island> 시리즈와 야산, 뉴타운 등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위장된 군사시설을 찍은 <Under cooled> 시리즈는 자본화와 세계화 속에서도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국가주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몽타주와도 같다. 
그럼에도 국가주의가 붕괴되는 장면은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거대 자본의 유입과 다국적 기업화 현상은 물론, 불법 이주노동자와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의 국제결혼 같은 개별적 이동도 막을 수 없는 현실이다. 구민자는 <직업의 세계>라는 작품을 위해 대만 현지에서 이주노동자를 자처했다. “몸이 튼튼하고, 영어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자신을 써 달라”는 구인광고를 들고 타이페이 시내를 누볐다. 결국 그는 어느 대만 할머니의 도우미가 되어 며칠간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우면서 돈을 벌었다. 비엔날레를 준비하면서 구민자는 타이페이에서 장기간 체류하게 됐다. 직업을 구하러 다니면서 또한 작가의 눈에 띈 것은 바로 타이페이의 독특한 창문 양식이었다. 보안과 미관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다양한 양식의 철창을 한데 모아 미술관의 큰 창에 설치한 작품 <비밀 정원>은 현지 사람들에게서 큰 인기를 끌었다. 대만 작가 유 쳉타(Yu Cheng-ta)는 타이페이에 체류 중인 외국인들을 섭외해 그들에게 대만어를 가르쳐 낭독하게 하는 비디오를 출품했고, 슬로베니아에서 온 그룹 어윈(Irwin)은 현장에서 비공식적 국가 NSK(Neue Slowenische Kunst)의 여권을 발급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미국 작가들로 구성된 IAA는 일명 ‘로보틱 오브젝터’로 불리는 소형 페인트차가 바닥에 그래피티를 찍어내며 글로벌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 벌어지는 재영토화 현상을 재치 있게 표현한다.
그러나 기자의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지 몰라도 올리버 레슬러(Oliver Ressler)가 기획한 특별전 <A World Many Worlds Fit>이 보여준 너무나도 직설적인 화법은 오히려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반민주적 자본주의의 현상을 고발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던 이 섹션에서는 앨런 세큘러(Allen Sekula)의 작품까지 3류 다큐멘터리로 보이게 했다. 다시 본전시로 돌아와서, 다소 진지해 보이는 슬랩스틱 비디오 작업을 한 호주 작가 숀 글래드웰(Shaun Gladwell)이나, 스탈린이나 피카소 등이 등장하는 콜라주 애니메이션을 만든 르네 버그(Lene Berg)같은 재기발랄한 작품이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작은 일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거대 담론을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가공 능력이야말로 ‘비엔날레용 아트’의 미덕이 아닌지….
해질 무렵부터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저녁이 되어 개막식이 시작되자 마구 쏟아 부었다. 그래도 개막식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비엔날레 개막식은 마잉주 총통이 참석할 정도로 ‘국가 행사’에 버금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번 비엔날레가 예년에 비해 예산이 많이 늘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술관뿐만 아니라 맥주공장, 지하철역, 타이페이 아레나, 일본 적산가옥 지대 등 다른 사이트로의 확장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하루면 모든 전시를 다 볼 수 있다.

아직 척박한 대만의 아트씬
역시 전날 내렸던 비는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태풍 실라코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다음 날은 태풍이 심하지 않아, 타이페이 시내의 전시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대만 아트씬에 대해 거의 백지 상태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국립현대미술관 MOCA.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에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미술관 입구의 사물함이 재밌었다. 사물함이 번호가 아닌 피카소 장팅겔리 미니멀리즘 퓨처리즘 등의 단어로 구분돼 있었는데, 한국에서 온 기자는 주저 없이 ‘리얼리즘’을 택했다. 정작 전시는 실망스러웠다. 미술관에서는 디지털아트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는데,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와 애니메이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근대 건축물을 리노베이션한 점과 같은 시기에 미디어시티서울이 열리는 점 등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이 묘하게 오버랩되더니, 신기하게도 그 이후 찾은 공간들에서 ‘한국’과 관련된 우연한 만남이 이어졌다.
미술관을 나와서 국제 레지던스 프로그램 타이페이 아트 빌리지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쾌적하고, 작가들이 작업을 하는 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마침 1층 전시장에서는 한국 입주작가 진시영과 공태윤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 다음 행선지에서는 대만 젊은 작가들이 자비를 모아 만든 VT살롱이다. 이곳은 오후 2시부터 새벽 2시까지 문을 열며, 간단한 술과 차를 파는 바와 전시장이 혼합된 형태다. 당시 전시 중이었던 작가 우 따쿠언(Wu Ta kuen) 역시 VT살롱을 창립한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마침 그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감각의 지형>전의 참여작가로 며칠 전 광주에 다녀왔다며 한국에서 온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우 따쿠언은 뉴욕 ISCP 레지던스에 입주한 적이 있어 작가 정연두와 윤정미 등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기자와 동행한 다른 한국 작가에게는 “홍대 나왔냐, 서울대 나왔냐”고 물을 정도로 한국 미술계를 잘 알고 있었다. VT살롱에서 몇 걸음 떨어진 IT파크는 1988년 세워진 대안공간으로 타이페이 현지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유의미한 전시장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 대안공간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IT파크는 한국의 대안공간과 마찬가지로 공간은 협소하지만 많은 작가들을 배출해냈다. 마침 기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잘 알려진 마이클 린(Michael Lin)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 작가 역시 IT파크에서 데뷔했다고 한다.
대만은 기자의 선입견보다 훨씬 가까운 나라였다. 운 좋게도 초행길이지만 헤매지 않고, 중요한 전시공간을 단시간에 섭렵하는 데 만족감에 취해 있을 무렵 문득 딴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서울이라면 하루 만에 주요 기관을 둘러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소리다. 며칠 동안 만난 대만미술 관계자나 작가들이 토로하듯, 대만에는 현대미술을 다루는 곳이 턱없이 부족하다. 타이페이비엔날레에서 대만 작가 양준(Yang Jun)은 작품 대신 타이페이에 현대미술센터를 짓자는 제안서를 냈다. 그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art in culture 2008년 11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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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un Gladwell

2008/12/30 15:35 2008/12/3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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