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남준아트센터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개관기념전으로는 당연히 백남준의 연대기를 다룬 회고전이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페스티벌 형식을 빌어 백남준, 그리고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젊은 예술가들까지 등장시켰다. 이러한 비선형적 전시를 기획한 이유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확률과 우연, 무지와 순진성, 우연한 사건, 거침없음에 의해 작동된다고하는 니체의 가르침은 불경스런 말이 아니라 축복의 말이다. 뒤샹, 존 케이지, 백남준은 그것에 있어 대가들이었다. 백남준은 평생 선형적 ‘시간’의 흐름과 그것을 거스르는 창조적 사고, 기억, 표현 행위를 병치시키는 일에 혼신을 기울인 작가다. 백남준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내게는 원칙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저 길이 비어 있으면 갑니다.” 그는 황무지에 가장 먼저 당도하는 잡초들(乙)을 따라 어디든 가는 유랑자였다. 그에게 모랄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나 질적인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잡초들의 쉼없는 반복, 변화, 생성하는 삶 자체에 있고, 그것은 백남준 예술의 참된 본성이라 본다. 마찬가지로 백선생의 예술 처럼 전시에 에너지와 정보를 압축적으로 개입시키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비선형적이 될 수밖에 없다.
2. 그러나 그 페스티벌은 일련의 ‘지역 페스티벌’에서 볼 수 있는 흥겨움이나 화려함은 없었다. 오히려 장엄하고 무겁게 느껴졌는데.
전위주의 운동의 기수로서 숭고함이 묻어 있어야 하고, 그 이면에 가벼움과 유쾌함과 개방성이 그를 아름답게 해야 했다. 일단 이번 행사에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문화 산업 논리와 깊히 연관된 후기의 백남준 예술은 일단 배제하고, '청년 백남준’의 가히 천재적인 발상과 빛나는 열정을 마음껏 부각시키고 싶었다. 따라서 비디오 조각 보다는 유동하는 창조적 사유와 돌발적 행위의 생동하는 측면을 전달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주동해서 독일어로 헤겔과 니체의 저서를 친구들과 읽으며 대화하는 모임을 종종 가졌다고 한다. 백남준은 니체를 즐겨 읽었고 그 자신 매우 니체적이다. 모든 것이 이미 다 드러나고 표현된 지금 예술에 있어 마지막 남은 과제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백선생은 간단히 아름다움이라 말했다. 아름다움은 가장 어렵다. 이번 전시에서 이런 특성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코 자신의 후원자 장 피에르 빌헬름의 사망 이후 그에 대한 백남준의 오마주 퍼포먼스 작업이다. 살아있음 자체에 대한 고마움,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의 기쁨, 피로, 하품, 심기 일전하여 점프해 보기, 그를 흉내내기, 길을 건너기, 하늘 한번 바라보기 등으로 이뤄진 흑백 사진 연작. 만프레도 레베가 찍었다. 또 하나 작품을 든다면, 비엔나 행동주의 예술가 오토 뮐이 감독한 영화 <Back to fucking Cambridge>에서 백선생이 작곡가 안톤 베베른에 대해 연기를 하는 단막극이다.
돼지우리 안에서 피아노를 치며 하녀와 성적인 농담과 유희를 즐기는 그 모습이 대단히 유쾌하고 천진난만하다. 백남준을 사상가로서, 그리고 창조 교육의 아버지로 조명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미술 시장에서 스타로 부각되기 이전의 백남준의 내면과 그의 통찰력을 건너질러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에게 덧씌워진 신비화의 거품들을 벗겨내는 작업이 요구된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백남준을 관통하는 유머와 번득이는 기지를 충분히 살려내기에는 턱없이 시간과 능력이 부족했고 본인이 너무 격렬하였다는 한계가 있었다. 유머와 놀이는 예술의 혼이라 함에도 불구하고...
3. 페스티벌 제목 ‘Now Jump'의 의미는 무엇인가? 잘 보면 ‘NJP'가 보이더라.
페스티발 제목은 몇 차례 변경되었다.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문구인 ‘무한광명/무한수명’, 파리에 있는 루스벨트 거리의 명칭을 따서 지어낸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보내는 성명서’, 마지막으로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지금 점프해라’ 등. 그러다 간단히 Now Jump로 정해졌는데 흥미롭게 우연히 그 안에서 N. J. P를 발견했다. 두개의 알파벳 글자를 간격으로 해서 음운이 딱 맞아 떨어졌다. 이것은 존 케이지가 피네간스 웨이크의 난해하기 짝이 없는 글 속에서 마르셀 뒤샹과 제임스 조이스의 영문 글자를 찾아내 표식을 한 것과 일치한다.
4. 페스티벌을 기본적으로 ‘스테이션 1~5’로 나눈 점, 좀더 세부적으로 스테이션 1을 ‘12음계’로 구성한 점이 흥미롭다.
스테이션(Station)은 백남준 예술의 핵심어. 백남준이 무명 시절에 쾰른에서 한때 조수로 일했던 라디오 스테이션이 영감의 원천이었고, 1984년 대도시의 스테이션을 연결하여 단번에 2천 5백만 시청자를 겨냥했던 <굿모닝 미스터 오엘>이 백남준 예술의 최대 승부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테이션은 방송국 외에 정거장, 발전소, 연구소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어 향후 NJP 아트센터가 해결해 가야 할 많은 과제들을 오각형 마운트의 스테이션으로 정리하였다. 스테이션1- 백남준의 예술 정신과 문화적 유산(상설 전시), 2- 사운드 아트와 실험극 또는 퍼포먼스, 3- 미디어 아트, 4- 딤론 생산, 5- 2009년부터 시작될 백남준아트센터상 개최. 첫 전시를 12음계로 구성해 스토리를 엮어 넣은 까닭은, 백남준 예술의 바탕이 신음악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고전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피아노가 비명을 지르게 만든 것은 독일 국민 모두에게 대단한 충격이자 잊을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선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중에 그는 1930년대 음악에서 중요했던 인물은 쉔베르크가 아니라 오히려 루이 암스트롱이라 수정하기도 했다. 음을 발생시키는 행위는 대지와 우주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정하는 적극적인 생명 활동이고 ‘역사적 선험’을 개시하는 창조 행위의 출발이다. 예술의 기원은 니체와 들뢰즈가 논증하듯 음악에서
출발한다는데 공감한다.
5. 개관식 때부터 미술관 밖에 알 수 없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얼핏 태극기의 색깔인 것 같기도 한데.
소리는 볼 수 없으므로 영역에 대해 경계를 표시할 수 밖에 없다. 센터 중앙에 휘날리는 깃발은 로두스 섬인 ‘백남준 나라’의 기이다. 근대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구성하는 네가지 색의 면적비를 계산하여 태극과 괘의 형태를 스트라이프로 해체했다. 개관 페스티발은 백남준 아트센터가 나갈 방향을 예시하고 싶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마니페스토’라 해도 좋을 것이다.
6. 미술관이라는 본격적인 인스티튜션의 수장을 처음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무엇을 가장 하고 싶었나?
글쎄... 백남준아트센터의 관장이 된다는 생각은 제로 퍼센트였다. 본인에게는 문화비지니스 차원에서 93년 휘트니비엔날레를 한국에 들어온 당시의 맥락을 비판적으로 보아온 사람으로 상업주의와 문화권력을 정면에서 비판해 왔다. 데이빗 로스는 깨끗하지 못하다. 백선생 주변에 워낙 특별한 전문가들이 많고, 미술관장은 인맥과 나이, 외교적 수완과 정치력에 좌우되는 자리니까 자의반 타의반 미술계 ‘왕따’로 살아온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하지만 갑자기 의욕이 생겨났는데, 국내에 본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복합적인 현대미술관이 아직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현대예술에 대한 엄청난 관심과 에너지의 폭증 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미술관 제도는 너무 낙후하다. 인맥과 정실주의,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지자체에서 아무리 미술관을 지어봐야 생겨나자마자 주저앉거나 고사할 지경이다. 관장직 제안이 오고 갈 때, 새로운 과제가 앞에 던져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예술계가 오랜 고립과 상호질시의 시대를 넘어가는 문턱. 그것은 국제화의 실질적 방안을 통해 판을
새롭게 짜는 일이다.
7. 그것은 아마도 그간 한국미술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인스티튜션의 시스템을 보아 오면서 아쉬웠던 부분에 대한 일종의 대안 제시일 듯하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어떤 방향을 생각하고 있나.
누구라도 삶의 실존적 드라마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 창조적인 '문화 매개 공간'을 목표로 한다. 백남준의 비디오 조각이 아니라 그의 사유와 행위를 핵심으로 비디오와 미디어 아트에 국한되지 않는 국제적인 복합 문화 센터. 백선생은 유언에서 미술관의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데 매여서는 안되며 혈기 왕성한 젊은 작가들을 키우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비영리적 목적의 큐레이토리얼 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탐구하는 국제 큐레이터 육성 기관. 국제화 시대에 큐레이터는 지식, 경험, 언어, 마인드에 있어 전방 공격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전시제작자'로서의 큐레이터는 한국이나 외국에서나 드물다.
8. 국제 큐레이터 양성을 위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자임하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
맥루한의 관점은 흥미롭지만 미디어 아트 작품은 재미가 없다. 동양 철학의 관점들이 흥미롭지만 동양화가 재미없는 것과 같다. 백남준을 요즘의 뉴 미디어 아티스트로 국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60, 70년대 서구의 지적,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전위적 사고와 과감한 예술 행위가 훨씬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 미디어아트 전문가도 이제는 필요한 때가 되었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국내 큐레이터의 활동이
전혀 국제라는 벽을 넘지 못하는 과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비행기들(작가들)만 있고, 제대로 된 활주로(큐레이터)가 없으니 온통 사고투성이다. 외국의 지명도 있는 큐레이터 그룹 속에서 인정받는 국제 큐레이터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지금까지의 한국 미술계의 구조 안에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글로벌 시대에 소통될 수 있는 프로토콜을 무시한 채 누구나 큐레이터를 자칭하는 아마추어리즘, 그것을 조장하는 미술계 구조로부터 일단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9. 미술관의 교육적 기능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으로 간주되어왔지만, 일반 관람객이 아니라 정작 예술가들이나 평론가/큐레이터들을 위한 교육적 기능은 간과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매달 2회의 강연을 개최하며 정기적으로 세미나, 심포지움 등을 가질 것이다. 대학원생 이상 연구자들, 활동가 중심으로 멤버쉽 제도를 운영할 생각이다.
10. 전례 없는 미술관 운영 방식에 대해 국내에서는 낯설게 받아들일 듯도 하다. 오히려 해외에서 온 주요 인사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센터의 미션에 대해 상당히 흥미로워 하며 이번 전시 공연 행사에 대해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성공적인 출발이라 생각하지만 지속성이 문제다.
11. 관장 수락 후, 전시 기획보다 전시 공간으로서의 미술관 내부를 갖추는 데 힘을 쏟았다고 들었다. 전시 공간으로서의 미술관 내부의 실내 건축과 디자인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시간, 비용이 위급할 시에는 집 주인 대리가 나서서 디자인할 수 밖에 없기도 하지만 미술관 사용자의 철학과 개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완전 텅 비어 있던 아트센터 내부 공간을 한옥 전문의 목수와 낮밤을 새워가며 1달 보름 여만에 끝냈다. 참고로 영주 부석사의 사찰 건물과 안동 서원 건축들에 대한 현지 탐사와 공간 디자인 연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전 세계에 3개의 에디션만 있는 아트센터 소장품 <TV 가든>을 백남준아트센터의 중앙에 영구 설치물로 배치했다. 워낙 실내 공간이 작아서 관객들 사이에 착시 거리를 만들려고, 가든의 형태를 음지 식물 중심으로 원시 정글 을 만들었다. 조경가의 철저한 기술 자문을 받아가며 직접 조경디자인을 했고, 수목원을 방문해 식재를 선택했다. 1주일 안에 완성되었고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2001년 경기도와 백남준 사이에 계약이 체결될 때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 명명했는데, 바로 그 집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마음에 드는데 과연 백남준이 얼마나 좋아할까..
12. 좀 전에 인터뷰 시작하기 전에 보니까, 페인트 색깔까지 참견하더라. 관장님이 너무 세세한 것까지 참견하면 일하는 사람들이 싫어할 것 같다.
관장이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관장이 예술감독으로서 행사 전체를 큐레이팅했으니까 세부는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비선형적 복합 구조를 좋아하며, 소탈하면서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일할 때는 평소와 달리 헐렁한 것을 인내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13. 공무원들과 일하면서 힘든 점은?
일을 할 때 공무원들은 흑백이 분명하여 차라리 낫다. 학예 파트에서건 행정 파트에서건 어설픈 민간인 전문가들이 항상 문제다. 12년전 광주비엔날레 당시 공무원들과 트러블이 많았다고 좀비들이 소문을 퍼뜨렸는데, 실상은 이권을 둘러싼 전문인들의 이해 다툼과 정실주의가 저지른 일이었고 지금도 다를 바가 없다. 소아병, 협잡, 배제… 등.
14. 학예실장과 홍보팀에 외국 인력을 투입했다. 공공 기관에서는 파격적인 인사였을텐데.
현장 경험이 많은 두명의 외국인 큐레이터를 고용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해보는 일이다. 더우기 학예실장을 외국인 큐레이터 가운데서 스카웃해 왔다.
그는 카셀 현대미술관(프레디시아눔)에서 르네 블럭 밑에서 5년간 큐레이터로 일을 했고 국제전 경험이 많다. 그외에 커뮤니케이션학, 예술철학, 미술사 등을 공부하고 런던 RCA 큐레이팅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등에서 일을 했거나 외국의 유수 큐레이터 코스를 마친 잠재력이 탁월한 젊은 큐레이터들도 있지만, 모두가 어시스턴 큐레이터의 직위로 한정했다. 큐레이터의 위상을 좀더 높게 좀더 엄중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다. 내부에서 반발이 상당히 있었다. 영어로 회의를 하고 토론하고 서류를 만들어가는 그 변화 과정이 중요하다. '국제’혹은 외부와의 연결을 내부의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적당히 이용하고 버리는 배타적인 시스템과 닫힌 마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백남준은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출생해 평생 유랑자(Nomad)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미국 국적의 예술가이다. 백아트센터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미술기관들이 외국인 전문가를 직원으로 고용하는 시기가 앞당겨져야 한다.
15. 전시장 초입에 있는 중국작가 왕싱웨이의 그림과 바로 옆에 놓인 유년 시절의 백남준 사진이 묘한 대칭을 이루는 듯하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연결시켰는가?
백남준을 단순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표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르셀 뒤샹을 정점으로 백인 남성 중심의 유럽 미술과 역사의 전문 분야 바깥으로 나가는 비좁은 출구에 백남준이 당당히 서 있고, 이는 백남준 자신이 '초인적' 발상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돌파해 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왕싱웨이 유화 그림에서 보듯이 뒤샹의 <거대한 유리>를 시원하게 깨버린, 즉 그 신화 구조에 큰 구멍을 내버린 동아시아의 어린 소년(인민군 복장을 한 개구장이)이 바로 백남준 자신이었다는 것을 하나의 질문으로 던지며 전시를 시작해본 것이다.
16. 정작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에 백남준의 작품은 많지 않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잘 보면 실제로 그렇지가 않다. 백남준 퍼포먼스 이미지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고, 오토 뮐 영화에 배우로 출현한 백남준, 후쿠이 방송국에서 촬영한 백남준의 일본 영평사 참선 장면 등은 새로운 발굴이다.
다만 백남준 비디오 조각 작품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뿐이다. KBS 방송국에서 했던 최근의 전시는 완전히 비디오 오브제와 설치 중심의 전시였다. 한국에서는 지난 15년간 백남준을 '비디오 패티쉬(物神)'의 대가로 만들어 대중화했을 뿐이다. 84년 이전 백남준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내에는 사방에 백남준 이름을 단 졸속 조각들이 넘쳐나고 있다. 개중에 명품도 많지만 이번 행사에서는 백의 비디오 조각은 단 한점도 외부에서 빌리지 않았고, 전시에서 중요하게 다루지도 않았다.
17.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갖고 있는 소장품 규모는 어느 정도 인가?
비디오 신시사이저, TV 정원, TV 달, TV 시계, TV 부처, K-567 로보트, 몽텐블루, 코끼리 카트, 삼원소(레이저 작품), TV 스테이션(레이저) 등 67점의 작품과 퍼포먼스 흑백 사진들을 포함하여 200여 점의 각종 자료, 굿 모닝 미스터오엘 등 대표적인 영상 작품들을 포함하여 약 2,3000개의 영상 자료들이 있다. 기본은 되는 셈이지만 매년 꾸준히 컬렉션에 신경을 쓸 계획이다.
20. 뉴욕 쪽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자료 구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들었다. 심지어 ebay를 통해서 헌책을 구해서 볼 정도였다고.
뉴욕의 백스튜디오는 도움은 커녕 계속 일을 방해했다. 흠집을 잡아 파워를 행사하려는 태도와 아트에 대한 지나치 몰이해로 스튜디오가 백남준의 위업을 깍아내는 일을 하지나 않을까 우려가 된다. 회심이 필요하다.
21. 인터뷰를 하며 느껴지는데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관장님께서 백남준의 팬이 되신 것 같다. 사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이번 행사에서 특이한 점은 기존의 ‘백남준 전문가’들보다 그동안 백남준을 잘 몰랐던 사람들로 하여금 백남준의 예술성을 깨우쳐주었다는 것이다.
과찬이다. 청년 백남준의 지성과 고민을 순수한 마음으로 음미하며 시간의 결을 거슬러 여행하고 싶었다. 60년대 초 절대 빈곤국에서 온 무명의 백남준이 백인 남성 중심의 예술판에서 가로지르기를 행하는 그 과정이 짜라투스트라를 닮았다.
22. 이번 전시에서 일본 전자공학자 슈아 아베의 등장이 눈에 띈다.
그는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관계가 아주 소원하게 여겨졌던 1963년 무렵 동경에서 백선생을 만나 작고할 때까지 평생의 친구로서 지냈다. 만주사변(1931년) 직후에 태어난 그는 백남준과 동년배로 참으로 맑은 인물이다. 1960, 70년대 백남준이 그에게 보내온 많은 서신들과 기타 자료들을 센터에 서슴없이 기증해 주었다. 참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이번 전시에서 백남준과 슈아 아베의 관계를 부각시키는 코너를 만들었다.
26. 위층에서 바라본 신갈고 전시장은 마치 감옥 혹은 노아의 방주 같은 인상을 받았다. 혹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아트씬에 대한 개인적인 스테이트먼트는 아닌가?
예술가들이 상업주의와 직업전문가주의(좀비)의 그물에 포섭되어 너무 일찍 살해당하는 것 같다. 출구가 없다. 그래서 과거를 재활성화하는 전시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태리 공연 연출가 로메오 카스텔루치가 이번 페스티발을 위해 신작을 만들었는데, 제목은 <천국>. 어두운 방 안의 벽면 상단부에 한 남자의 상체가 벽체에 뚫린 구멍에 꽉 끼여진 상태에서 틈으로 물이 세차게 품어져 들어오는 퍼포먼스 설치 작품이다. 고통받는 한 인간의 도움으로 구멍난 배가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잠시 멈추어진 상태다. 천국은 죽어서 가게되는 영혼의 쉼터가 아니라 한밤 중에 배에 구명이 난 비상 사태의 국면에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노아의 방주에 구멍이 나 있고 자신이 그 구멍에 몸이 반쯤 끼워진 한계 상황이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27. 또한 그곳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배치한 이유는?
미디어가 확산되어 갈수록 통제 사회는 조밀해져 간다. "기술을 증오하기 위해 기술을 취한다"는 백남준의 경구는 통제 사회에 대한 적절한 은유이다. 체육관 건물의 전시는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한 접근이었고, 그곳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배치했다.
28. 스테이션2의 퍼포먼스들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아무래도 전문 공연장이 아니어서 실제로 힘든 점이 많을 것 같다.
24개의 퍼포먼스 팀이 참가하였다. 공연분야에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계원대 김성희 교수를 감독으로 하여 일을 맡겼다. 미술관 안에서 전시와 공연을 결합하는 일은 예술의 '수행성(Performativity'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흥분되는 점이 있지만 그 댓가를 치러야 하는 일도 많다. 프로그램은 대단히 훌륭하였다.
29. 반대로 관객 입장에서도 퍼포먼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좀 낯설다.
낯설고 생경한 것은 오히려 좋다. 문제는 전시와 좀더 긴밀하게 얽혀들기에는 소음, 조명, 공간의 스케일 등이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30. 스테이션 4, 5에 해당되는 국제 심포지엄 및 워크숍, 저널 발간, 시상 제도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2월 4일부터 3일간 국제심포지움이 있을 예정이다. 바전 브럭,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부르노 라투어, 존 라이크먼, 미크 발 등을 초청하기 위해 접촉 중에 있다. 2009년 사업 계획으로 정기적인 국제저널을 발간하려고 한다. 그리고 백남준아트센터상을 시작할 것이다. 대상은 전세계 아티스트이다. 분야는 미디어에 제한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