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킴’하면 교복 입은 소녀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한 동안 전시장에서 이 소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2006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던 개인전 <완전한 풍경>(Perfectly Natural)에서조차 교복 입은 소녀 대신 전통 자수의 모티프를 얻은 회화가 주조를 이뤘다. 그리고 이후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동안 작가는 다시 유니폼(교복)을 입은 소년들과 함께 돌아왔다.

개념적 회화, 회화적 개념미술. 이 두 가지 미술의 형식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써니 킴의 작품 세계를 더듬다 보면 자연히 그 차이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교복 입은 소녀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다 자라버린 소녀의 그림. 이러한 써니 킴의 초기 작업은 회화라는 매체를 사용한 개념미술의 느낌이 강했다.
교복 입은 소녀를 그리는 이유
써니 킴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작가는 1.5세대 재미교포라는 성장 배경을 갖고 있다. 써니 킴이 미국으로 이민 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작가는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계속 교복을 입어 왔고, 그래서 써니 킴은 자신의 가까운 미래 모습을 교복을 입은 ‘단정한 여고생 언니’로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이민’이라는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는 어린 소녀에게 적응을 강요했고, 물론 교복 입은 여고생의 미래도 빼앗아 버렸다.
써니 킴에게 있어서 교복은 역사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소속감을 부여하는 장치에 가깝다. 집단화는 구속을 주기도 하지만 명백한 정체성을 부여함에 따라 오히려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독립큐레이터 이은주의 말대로 써니 킴에게는 ‘규율’은 억압의 장치가 아니라 그의 흔들림을 잡아줄 수 있는 기준점이자 그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안전한 기반으로서 수용되었다. 당연히 찾아올 줄 알았던 미래의 초상을 겪지 못했던 트라우마 때문에 써니 킴의 유년기는 언제나 모호하고 누락된 시공간으로 남아 있다. 써니 킴은 초기 작업에서 이런 모호함과 불안정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오래된 졸업앨범에서 가져왔을 법한 여고생의 소풍이나 수학여행 사진 이미지들을 재조합해 외적 형태만 몽타주해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 치밀하게 계산한 도안을 그래픽디자인 이미지나 판화로 오인될 만큼 플랫한 느낌으로 그렸다.
또한 <Garden>(1998), <Underworld>(1999) 등 1990년대 후반의 작업에서 소녀들의 배경으로 이따금씩 등장했던 전통자수 배경은 이후 2006년 일민미술관에서 개최한 개인전 <Perfectly Natural>에서 동양과 서양이 합체된 ‘완전한 풍경’으로 발전한다. 제목부터 아이러니해 보이는 이 전시에서 선보였던 <수양버들> <바위와 구름> <Flying Birds Lavender>(2005) 등은 전통 자수를 모티프를 삼고 있지만 교복 입은 소녀들을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껍데기의 공허함을 좇을 뿐,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그려냄으로써 심리적 보상을 받는 공간에 다름 아니다. 의도적인 차용과 배제에 근간을 둔 작업 방식은 여전하다. ‘완벽한 자연스러움’이라는 이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와 이를 표현하는 이성적이고도 다분히 의식적인 창작 방식은 명료한 의미 전달을 통해 주제를 강조하는 개념미술의 모습과 상당 부분 닮아 있었다.
열린 내러티브, 새로운 카논을 제시하다
개인사에서 출발한 써니 킴의 그림은 때로는 코리안 아메리칸이나 디아스포라 화두로, 때로는 전통의 현대화의 화두로 확대 해석되곤 했다. 그러나 담론은 유행을 타기 마련이고, 이러한 속성 때문에 작품의 생명력을 단축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일민미술관 개인전 개최 이후 한동안 써니 킴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었다. “2년은 정말 힘들었었고, 그 후에는 정돈이 된 것 같아요. 일민미술관 개인전 이후 이전 작업을 그만두고 옛날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뒤집어서 생각하면서 태도와 작업이 변하기 시작했죠. 또한 과거에 비해 조금 더 자유롭고 관대해진 면이 있어서 그림 그리기가 훨씬 편해졌어요.”
그로부터 3년여의 시간이 지난 최근작은 이전의 그림과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최근작에서 작가가 머리가 아닌 손으로 그리고 있음이 확연하다. 그간 써니 킴은 그림의 매력에 한층 빠져 ‘회화’라는 고전적인 미술의 형식에 천착하는 시간을 가진 듯하다. 작가 역시 스스로 본인의 최근 작업이 ‘회화적’으로 변모했다고 고백한다. 가장 큰 변화는 그림의 레이어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과거 한 겹으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그래픽 이미지 같은 질감이 아니라, 물감을 여러 겹 덧발라 작은 면적에서도 여러 가지 색깔이 중첩돼 드러나 보인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몽상적이고 아련한 분위기로, 맛과 냄새가 나는 그림이 되었다.
레이어의 증가는 색감뿐만 아니라, 디테일을 살리며 대상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캔버스에 그린 것은 정지된 순간이지만, 그려진 대상에서는 약간의 미동이 포착된다. 과거 교복을 입은 소녀, 혹은 전통자수에 등장하는 오브제의 외곽선에 주목하게 했다면, 최근작에서는 캔버스 화면 전체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이미지의 내러티브를 강화시킨다. 화면은 대상뿐만 아니라 공간감과 빛에 의해 완성되고, 아울러 관객의 시점을 의식하면서 거리감 역시 주요 구성요소로 가져왔다. 가령 <Window>에서는 창밖을 바라보는 두 소년의 양쪽에 흰 벽이 놓여 있는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소년들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기분을 주기도 하고, 건너방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잃어버린 기억을 현재화시키는 것, 혹은 상상의 미래를 끄집어내어 현재에서 해석하기 위해 그에게 중요한 연구 방법은 영화와 소설을 보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는 영화에 나온 장면을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있을 뿐 아니라, 영화와 소설 특유의 서사적 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써니 킴의 회화에서 구체적인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움직이고 있는 이미지의 한 장면처럼 보여 전후 상황이 궁금해진다. “대상보다는 현재 그 대상이 처한 상황 자체를 그리고 싶어요. 이야기가 한참 전개되고 있는 중간을 잠깐 멈춰 놓은 듯한 느낌말이에요. 움직임을 살려서 이 이미지의 전은 뭘까, 후는 뭘까, 나는 어디에 있나…. 그 주위를 생각하게 되는 거죠.”
또 다른 차이점은 과거 소녀들과 달리 소년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인물은 정면이 아니라 뒷모습만 그리거나 머리 아래로만 그린 옆모습들이다. 표정이 없어 소녀들의 표정에서 목격되던 인위적이거나 가식적인 느낌은 없지만, 그들의 동작에서 여전히 경직되고 어색한 느낌이 의도적으로 들어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소년들은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유니폼(교복)을 입고 있다. 소년들의 복식은 소녀들이 입었던 1960년대의 교복이라기보다는 흰 셔츠에 검정색 반바지에 멜빵을 맨, ‘단정한 차림’으로 보인다. 최근작에서 소년들의 외양을 보고 나니, 과거의 소녀들도 달리 보인다. 등장인물이 입은 교복은 물론 그동안 써니 킴의 작품에서 충분히 이야기됐던 근대사, 집단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밖에 다른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상에게 같은 옷을 입힘으로써 작가의 비감정적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고, 어쩌면 작가의 미적 취향이 반영된 회화적 장치일 수도 있겠다. 유니폼을 입은 대상들은 하나 같이 꽤 균형 잡힌 일정한 체형이다. 여기서 오는 또 다른 경직성은 동시대의 새로운 회화적 ‘카논’(Canon)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술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회화’라는 형식에서 화가가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개념적 실험으로 점철된 동시대 미술에서 회화는 어떻게 수용, 이해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동시대 미술에서 그림이 가지는 힘은 유효하다. 단, 과거의 회화와 달리 훨씬 내밀한 사유와 선택적 장치가 필수조건으로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 난제 때문에 작가는 그간 꽤 오랜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써니 킴은 작업이 지금처럼 더욱 회화적으로 변모하기까지 그림을 그릴 때 갖는 ‘태도의 변화’가 가장 컸다고 말한다. 그의 그림은 열린 내러티브와 새로운 카논을 통해 회화적 개념미술에서 개념적 회화로 한 걸음 또 나아가고 있다.
art in culture 2010년 1월호 <아티스트 인사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