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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말로가 이야기했던 ‘문화 민주주의’를 펼치는 것이 목표다.” 모철민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의 말이다. 첫 마디부터 그의 ‘행정 철학’이 일반 관료와 사뭇 다르다. 모 차관은 문화부에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국 프로젝트 매니저, 문화관광부 예술국장, 문화콘텐츠 실장 등을 두루 거친 ‘정통 관료’ 출신이다. 모 차관은 예술적인 기질도 다분하다. 파리에서 2년 간 주불프랑스문화원장을 지낸 그는 현지 작가들과 돈독한 예술적 우의를 다졌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2007년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뤄 냈고, 그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희소식이 들려 왔다. 내년도 문화체육관광부에 편성된 예산이 3조 3,709억 원 규모로 작년 대비 6.2% 늘어 났다. 이 예산은 정부 총 재정의 1.09%, 역대 최대 점유율이다. 모 차관은 “문화예술 분야의 중요성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로, 문화예술은 국민의 행복지수 및 삶의 질 문제와 직결되고 사회 통합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확대된 예산의 많은 부분은 ‘문화 복지’, 즉 향유 분야에 쓰인다. 첫째, 찾아 가는 문화 순회공연, 우수 문학도서 나눔사업 등 ‘소외계층 문화역량 강화 사업’에 229억 원을 책정했다. 둘째, 문화예술교육 강사 파견에 500억 원을 투자한다. 셋째, 기존의 공연 분야에 한정됐던 바우처 사업에 전시회를 추가할 방침이다.사업 예산도 50억에서 245억 원으로 5배 늘리고, 수혜 대상도 35만 건에서 163만 건으로 확대한다. 이 모두 앞서 모 차관이 강조했던 ‘문화 민주주의’ 철학이 반영된 듯한 사업들이다. 그밖에 인도 헝가리 터키에 한국문화원을 새롭게 설립한다. 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한글박물관을 설치하고, 재외 한글교육기관 ‘세종학당’을 확충한다.
특히 미술시장의 장기 침체에 대한 해결책으로 문화부 산하의 한국방송광고공사와 함께 남한강 연수원 부지에 ‘미술 특구’ 조성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2013년 완공을 목표로 11만 평의 부지에 갤러리 100개, 스튜디오 100개, 아트페어 전시장을 비롯, 방문객을 위한 아트텔 등의 미술 인프라를 구축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모 차관의 미술에 남다른 애착은 국립중앙도서관장 재직 시절 서초동 디지털도서관을 개관하면서 1층에 따로 전시 공간을 만들어 <아트@디브러리>전을 열었던 전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큐레이터 김애령이 기획한 이 전시에는 작가 홍승혜 이재이 류호열 등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선보였다. 또한 그는 주불한국문화원장 재임 시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전시뿐 아니라 크리틱, 국제 교류에 이르기까지 확장시킨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좀처럼 자리잡기 힘든 젊은 작가들에게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모 차관은 그 당시 발굴한 작가 민정연 성지연 장리라 등을 가리켜 ‘파리문화원 키즈’로 부르며 자신의 큰 보람으로 꼽았다. 문화예술과 또 다시 바쁜 한 해를 보낼 모철민 차관께 미술 분야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기대해 본다.  
-art in culture 2011년 1월호

2011/01/19 22:29 2011/01/19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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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조용히 그리고 꿋꿋하게"




김승덕은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한국인 큐레이터다. 현재 그가 국제프로젝트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르콩소르시움은 유럽에서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기관으로 손꼽힌다. 르콩소르시움은 전시장뿐만 아니라 출판사 ‘레프레스뒤레알’, 영화사 ‘아나산더스’를 함께 운영하면서, 작가들의 다양한 창작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르콩소르시움은 오는 5월 10일 재개관을 앞두고, 1,300여평의 규모로 증축 공사가 한창이다. 재개관 기념전에는 리차드 프린스, 댄 그라함, 베르트랑 라비에, 이자 겐즈켄, 신디 셔먼 등 르콩소르시움의 30년 역사를 함께 써온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다. 김승덕은 르콩소르시움의 창립 멤버이기도 한 프랑크 고트로와 오랜 커플인 동시에 공동 전시 기획을 해오고 있다. 이 커플은 지난 10여 년 동안 쿠사마 야요이와 린다 벵글리스의 개인전을 네덜란드 호주 미국 등지로 순회시켰고, 2004문화수도 릴 <플라워 파워>전, 2005발렌시아비엔날레 등을 기획했다. 이들은 한국에 대한 애정도 깊다. 두아트(갤러리현대)에서 <디 얼라이언스>전을 만들었으며, 2007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도 커미셔너로 참여한 바 있다. 또한 본지에 종종 해외의 전시나 작가를 기고하며 동시대 글로벌 이슈를 한국에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고 있다. 그 친분으로 기자는 2007년 비엔나쿤스트할레에서 열렸던 한국현대미술전 <엘라스틱 터부>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참여하게 되면서, 그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지난 12월, 역시 프랑크 고트로와 함께 서울에 들어온 김승덕을 만나 흥미진진한 ‘글로벌 라이프 스토리’를 들어 봤다.

art 프랑스에 거주하시지만 그래도 1년에 한두 번은 꼭 뵙게 되는 것 같네요. 한국과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것 같아 좋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김승덕(이하 김) 부르고뉴에서 건축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리서치 차 들어왔습니다. 또 출판 일도 있었고, 해인사에서 열린 심포지엄에도 참여했어요.
art 출판 일이라면 르콩소르시움에서 운영하는 출판사 ‘레프레스뒤레알’의 책과 관련이 있는건가요?
김 맞습니다.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성의 미학》의 한국판이 김성원 선생의 번역으로 현실문화연구에서 곧 출간될 거에요. 이번에 김수기 대표를 만나 또 한 권의 책을 추천했습니다. 건축가 헤르조그 앤 드메론(Herzog & De Meuron)의 스승이기도 한 레미 조그(R뢭y Zaugg)의 《내가 꿈꾸는 미술관(Le Mus뢤 des Beaux-Arts auquel je r뢹e ou le lieu de l’oeure et de l’homme)》이라는 책이에요. 요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등으로 국내에서 미술관 건축 논의가 일고 있는데, 이 책은 건축 학도들에게는 거의 바이블과 같죠.
art 미술관 건축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가 봅니다.
김 물론이에요. 현재 르콩소르시움도 증축 공사가 한창입니다. 시게루 반이 건축을 맡았어요. 그러나 제 아무리 유명한 건축가라 하더라도 클라이언트가 디렉팅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건축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A부터 Z까지 정확한 프로그램을 놓고 많은 대화 속에서 진행하면 적은 예산으로도 충분히 좋은 건축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뉴욕에서 베니스로, 마침내 파리로
art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우선 ‘글로벌 라이프’부터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찍이 미국으로 이주해서,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에서 15년 정도 살고 계신데 그 여정을 간략히 말씀해 주시지요.
김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 갔습니다. 미술사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가서 신나게 미술관도 다녔죠. 그 당시에 돌아가신 화가 문미애 선생과 조각가 한용진 선생이 제가 잘 아는 언니의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주말에 놀러가면 그 집에 작가들이 많이 왔어요. 김종학, 김창열 선생 등….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한국 미술계와 관련해서 일할 생각은 못했어요. 또 어릴 적부터 불어를 좋아해서 대학원에서는 프랑스문화사를 전공했습니다. 당시에 교내 연극에서 몰리에르의 타루튀프역을, 그것도 동양 여자가 남장으로 주인공을 맡아 상도 탔답니다. 틈틈이 용돈도 벌 겸 패션계에서도 일해 봤어요. (웃음)
art 젊은 시절에는 다 방면에 호기심이 많으셨나 봐요. 그러다가 다시 미술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김 한국에서 88올림픽조각공원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제가 영어를 할 줄 아니까 데니스 오펜하임, 라파엘 소토 등 해외 참여 작가 60여명을 돕는 일로 잠깐 들어왔어요.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컨템포러리아트가 무엇인지 잘 몰랐어요. 물론 큐레이터의 꿈을 꾸지도 않았죠. 그 일을 하면서 미술이론을 좀더 깊이 공부해야겠다 싶어 미국에 돌아와 미술사로 대학원에 다시 들어 갔어요. 그리고 대학원 수업 과정의 일환으로 뉴뮤지엄에서 인턴으로 일했죠.
art 뉴욕 뉴뮤지엄이라면, 마치 르콩소르시움처럼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미술을 수용하는 곳인데, 그때부터 대안적 성격의 미술기관에 관심을 가졌나 보죠?
김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나의 기본 성향이 그랬기 때문에 MoMA나 휘트니미술관보다는 뉴뮤지엄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art 그때부터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그 사이 1990년에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아이디어로 서울아트페스티벌이 열렸는데 거기서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 행사 심사위원 중에서 아킬레 보티토 올리바가 있었지요. 훗날에 그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동양으로 가는 길>전의 총감독이 됐는데, 제가 시게코 구보타와 요코 오노 전시를 도우면서 이때부터 베니스에 살게 된 거에요. 그후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부대전시 중 하나였던 <아시아나>전을 맡았는데, 이 전시가 큐레이터로서의 데뷔라고 볼 수 있죠. 참여작가는 김진수 홍명섭 차우희 선생이었어요.
art 베니스에 계셨지만, 이때에도  한국에 종종 오셨던 것 같던데요.
김 돌아가신 황현욱 선생께서 대학로 인공화랑을 운영할 때 제가 대학원에서 미니멀리즘에 대해 논문을 썼다는 소문을 듣고 절 찾으셨죠. 도날드 저드, 리처드 롱 등의 전시로 베니스와 서울을 오가면서 일했습니다. 거기서 홍명섭 문범 김용익 등 좋은 작가들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참 신나게 일했던 때였죠.
art 이즈음부터 삼성과도 일하게 된 거죠?
김 네, 그때 삼성미술관 건립 프로젝트를 앞두고 유럽에서 컨설팅 큐레이터로 일 하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지금의 리움이 아니라, 운현궁 근처에 프랭크 게리와 세우려 했던 프로젝트가 있었거든요. 그 일을 하면서  《월간미술》에 주요 미술관 디렉터와의 인터뷰 기사를 쓰기도 했지요. 하랄트 제만도 하고 당시 알려진 지 얼마 안 된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도 인터뷰했는데,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삼성 관계자들에게 어떻게 미술관과 컬렉션을 운영해야 하는지 전하고 싶었습니다. 베니스에서 살았던 3년 동안 여러 미술관 사람들을 만나고 유럽의 주요 전시들을 둘러보면서 정말 재미있게 공부했답니다. 그러다가 퐁피두센터에 객원 큐레이터로 초청을 받아 파리로 이주하게 된 겁니다. 월급을 따로 받고 일한 건 아니었고, 삼성미술관 준비 차원으로 소장품 관리 파트로 들어간 것이었죠.
art 2001년 로댕갤러리의 왕두 전시도 기획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 그때 한참 왕두가 세계적으로 잘 나갔는데 르콩소르시움에서 보여 줬던 작품 일부와 함께 로댕갤러리의 <지옥의 문>과 연관지어 ‘20세기판 지옥의 문’을 해석하는 새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로댕갤러리 이후에는 전 세계에 <지옥의 문>을 소장하고 있는 다른 미술관으로 순회하는 프로젝트로 기획했는데, 결국 이미 있던 작품만 전시하게 됐지요. 또 그때 프랭크 게리 프로젝트도 중단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죠. 그래서 그 즈음 삼성과의 관계를 정리했던 겁니다.

르콩소르시움의 ‘구조가 없는 구조’
art 제가 대학 시절 배낭여행으로 르콩소르시움을 처음 갔을 때가 떠오르는 군요. 그때 마침 한국 작가 이불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죠.
김 그렇다면 2002년이겠군요. 르콩소르시움은 한국 작가들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김홍석의 <Love>와 최정화 현수막 작업이 소장돼 있어요. 나중에 소장품은 디종시 미술관에 기증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art 암튼 그때 저는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수업 시간에 아주 중요한 미술기관이라고 배워서 일부러 파리에서 떼제베까지 타고 내려 간 건데 그렇게 낡은 공장이라니, 장소를 잘못 찾은 줄 알았다니까요.(웃음)
김 처음 온 사람들은 종종 그래요. 1977년 디종의 작은 책방에서 프랑크 고트로와 자비에 두루, 에릭 콜리아르가 만든 르콩소르시움은 1982년 디종 시내에 첫 번째 아트센터를 열었고, 1990년에 두 번째 공장 공간을 열게 되었지요. 그 허름한 공간에서 다니엘 뷔렝, 한스 하케, 로렌스 뷔너 같은 작가들의 기념비적 전시들이 열렸던 것이지요. 1996년 에릭 트롱시가 새 디렉터로 들어오면서 필립 파레노, 리암 길릭, 피에르 위그 같은 젊은 작가들을 수용할 수 있었어요.
art 디렉터 중에서 3명은 프랑스인이고 김선생만이 유일한 외국인이자 아시아계인데,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 집단에서 ‘타자’로서 겪는 어려움이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대개 해외에 나가면 고정된 직장을 갖기 힘들다던데, 어떻게 르콩소르시움에 합류하게 되었는지요?
김 르콩소르시움이 1999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컬렉션 전시를 연 것을 기점으로 국제적으로 진출하게 됐는데요, 쿠사마 야요이 순회전으로 제가 ‘국제 프로젝트 디렉터’라는 타이틀을 받았습니다. 타이밍이 잘 맞은 것이죠.다행히 쿠사마 순회전이 성공했고, 특히 2005년 발렌시아비엔날레가 저에게는 터닝포인트가 되었어요.여기는 모두 결과로만 보는 곳이에요. 다들 오토크리틱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결과가 별로면 스스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art 르콩소르시움이라는 전시 공간을 운영하면서, 출판사와 영화사를 함께 운영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김 동시대적인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는 아주 전문적인 ‘툴’을 붙여 주고자 하는 데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죠. 전시로 보여 주고 나눌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책이나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따로 있잖아요. 출판사 ‘레프레스뒤레알’은 꽤 자리를 잡아서 요즘엔 책을 내고 싶다는 제안이 제법 들어와요. 또 ‘영화사 아나산더스’에서 배급한 작품은 칸영화제에서 2002년 신인상과 2004년 심사위원상을 탔고, 2010년에는 최고상인 황금월계수상을 받게 되었지요.
art 최근 국내에서도 르콩소르시움의 이러한 ‘열린 구조’를 롤 모델로 삼아 프로젝트를 만들려는 기획자들이 종종 보입니다.
김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구조가 없는 구조’에요. 르콩소르시움에는 총 13명이 일하는데 그 중에 디렉터급이 저와 프랑크 고트로, 자비에 두루, 에릭 트롱시 이렇게 4명인데요. 그렇다고 디렉터와 어시스턴트의 업무에 상하 개념이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시키는 사람도 없고 지켜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프랑크 고트로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래픽을 공부한 사람이 아닌데, 없는 예산 속에서 도록을 내려니 다른 곳에 맡길 여유도 없어서 직접 편집디자인을 맡게 됐어요. 그렇게 일한 지 35년이 지나다 보니까 이제는 외부 작업도 맡아서 할 정도로 전문가가 됐지요.(웃음) 르콩소르시움은 일할 수 있는 ‘틀’만 주는 것이고, 각자가 스스로 놀면서 일을 벌여야 해요. 그런 결과물들이 쌓이면서, 운영 면에서도 예전에는 마이너스였다가 수입과 지출의 적정선이 맞춰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르콩소르시움이 예산이 많은 줄 알지만, 사실은 60% 정도를 정부와 디종시에서 지원을 받고 40%는 스스로 충당해야 합니다. 큐레이터들의 외부 전시기획비, 컬렉션 자문 등의 수입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art ‘버는’ 것보다 ‘벌이는’ 개념이로군요. 참 이상적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오랫동안 그 인원이 신나게 일할 수 있죠? 자칫 불화가 생길 수도 있을 텐데.
김 다들 개성이 강한 사람들인데, 갈등이 왜 없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왜 함께 일하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 충분히 공유하고 있고, 정신적 유대감이 굉장히 단단합니다. 보이지 않는 구심점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매 순간마다 대화를 충분히 하는 것이 결속력의 가장 큰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art 아, 잠깐 다른 질문 하나 드릴 게요. 프랑크 고트로와 일과 사랑을 동시에 하고 계시잖아요.(웃음) 이번에도 같이 오셨던데, 늘 함께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김 일과 사랑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 두 가지를 한 사람과 같이 나누니 저는 매우 축복받은 사람이라 생각해요. 프랑크 고트로와 전시 기획을 함께 한 지도 10년이 되어 가지요.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도 자주 있지만 서로 버틸 만한 이유가 있는 한 서로를 존중해요. 이런 의견 교환과 다른 생각의 엇갈림이 좋은 에너지로 환원될 때, 우리 커플의 전시의 메시지도 잘 표현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적당한 타협은 원치 않아요. 특히 전시 설치 때에는 치열하게 싸우기도 하는데 결국에는 정리된 결론에 이르게 마련이에요. 요즘은 모더니즘과 포크 아트의 주제로 회화에 나타난 현상을 연구 중이고, 공동 큐레이팅으로 전시 할 예정이에요. 아무리 진부한 소재라도 나름대로 도전이 될 수도 있어요. 2004년 문화수도 릴의 ‘꽃’ 전시가 그랬고, 그 후 발렌시아비엔날레의 주제 ‘물’ 전시 경우도 그랬죠. 먼저는 물이라는 주제를 좀더 시적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그래서 나온 부제가 ‘깊은 바다 속 물고기의 생각’ 이었죠.

예술은 혁명이자 새로운 도전
art 한국 작가들을 해외에서 알릴 때 어떤 점에 유의하시나요?
김 한국 작가라서 이슈화하는 것이라기보다 미술사 쪽에서 덜 조명된 부분을 찾는 것이 중요해요. 백남준도 마찬가지에요. 충분히 이름은 알려져 있지만 그가 남기고 간 글을 보더라도 그 분의 세계관을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거의 철학자의 위치에서 얼마나 앞서 가는 생각을 했는지 재평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백남준에 관한  책을 저희 ‘레프레스뒤레알’에서 영어, 불어로 출간하려고 해요.
art <아시아나>전을 비롯해서, 슈투트가르트 소형트리엔날레 등을 통해 한국 작가를 해외에 소개해 오긴 했지만, 2007년 비엔나쿤스트할레에서 열렸던 <엘라스틱 터부>전이야말로 본격적으로 한국미술을 정리한 유일한 전시였는데요. 저 역시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참가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김 저는 기본적으로 ‘국제 교류전’ 성격의 상투적인 전시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나 <엘라스틱 터부>전은 좀 달랐죠. 한국미술을 전체적으로 공부할 계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고, 전시를 통해 내 나름대로 해석해 내고 싶었어요. 또 외부에 있는 한국인인 나, 그리고 완전히 외국 사람인 프랑크 고트로가 함께 기획할 때 드러나는 최대의 시각적 효과를 노리고자 했습니다.
art 저는 <엘라스틱 터부>전에서 박이소 작품이 전시장 입구에 놓여 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김 네. 대개 동시대 한국미술에서 신세대가 구세대와 나뉘는 시점에 하나의 브레이크 포인트로 박이소를 내세우지만 정작 그의 작업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못다한 얘기들이 남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신세대와 구세대의 애매모호한 시작점으로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 밖에 민중미술과 모노크롬 작품들이 같은 전시장에서  만나거나, 박서보의 회화 작품에 맞춰 젊은 사운드 아티스트 버블리피시에게 특별히 주문한 음악을 틀어 놓는 등 색다른 충돌과 조화의 효과들을  전시장 곳곳에 숨겨 놨죠.
art 20세기의 최고의 큐레이터로는 만장일치로 하랄트 제만을 꼽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술의 범주가 훨씬 더 넒어지면서 큐레이터의 역할도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혹자는 이제 큐레이터의 시대도 지나갔다고 하더군요.
김 큐레이터의 어원은 ‘쿠라레’, 라틴어로 ‘돌본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큐레이터는 작품을 돌보고 나아가, 작가와의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 내는 사람인 거죠. 가령 쿠사마가 개인전을 그냥 혼자서 할 수도 있는데 왜 큐레이터가 필요하냐고 물어본다면, 설명해 볼 게요. 제가 처음 쿠사마를 만난 것이 1998년 런던 서펜타인갤러리에서 전시할 때였어요. 근데 전형적인 회고전인 거에요. ‘야, 이거 너무 재미없다. 좀 더 신선하게 조명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을 했죠. 그래서 그 이후 좀더 작가에 대해 연구해 보니, 미술사적으로 봤을 때 환경미술을 처음 시작한 사람 중 하나인 거에요. 그래서 2000년에 우리와 전시할  것을 권유하면서 아무거나 해도 좋으니, 대신 설치 쪽으로 집중했으면 한다고 하니까 쿠사마가 너무 신나하는 거에요. 그래서 2001년부터 세계 순회전을 열게 된 겁니다. 결국 전시는 쿠사마가 한 겁니다. 그러나 기회는 우리가 준 거에요. 작가로부터 뭔가 새로운 것을 끄집어 내고, 슬럼프에 빠져 막혀 있는 상태에서 나올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게 큐레이터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art 최근 한국에는 큐레이터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큐레이터가 지녀야 할 미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돌이켜 보면 제가 큐레이터를 업으로 삼으면서 가장 유리했던 점은 작가들과 함께 일했다는 거에요. 제가 처음 일했던 88올림픽조각공원 때도 그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또 ‘시각적 트레이닝’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만 되면 우리의 일상 생활도 매우 풍요로워지는 것 같아요. 시각으로부터 출발하면 청각, 촉각 모든 분야에서도 얻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아지거든요. 우리에게 있어 전시나 영화 프로젝트 그리고 책 만드는 일까지, 이런 일들은 매번 새로운 지적 모험이고 동시에 시작점입니다. 전시나 공공 미술, 혹은 비엔날레 등 행사 제안을 받았을 때, 창고에 저장해 놓은 기성품을 그냥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회마다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슈를 창조하고 해결책을 찾지요. 미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항상 새로운 도전인 동시에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생각도 유연하게 할 수 있어야 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art 오랜 시간 말씀을 나누고 보니, 평생을 예술 안에서 숨 쉬며 살아 오신 것 같네요. 참으로 구태의연한 질문이지만 그토록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김 예술은 결국 혁명입니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하겠지만, 저는 결국 예술이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프리존’이라고 생각해요. 예술가들이 하는 것도 결국은 일상을 위한 복지와 같아요. 정치가에게는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열어 주고, 노동자에게는 쉼과 에너지를 줄 수 있잖아요? 아이디어를 사는 사람이 있고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은 작가나 큐레이터가 아이디어를 파는 사람인 겁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좋은 에너지로 아이디어를 끄집어 낸다면 사회에서 ‘보약’으로 쓰일 수 있는 거에요. 결국 제가 왜 이 분야를 이렇게 좋아할까 생각해 보면, 작가들과 일하면서 꿈 꿀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art in culture 201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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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8 12:08 2011/01/1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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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남준아트센터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개관기념전으로는 당연히 백남준의 연대기를 다룬 회고전이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페스티벌 형식을 빌어 백남준, 그리고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젊은 예술가들까지 등장시켰다. 이러한 비선형적 전시를 기획한 이유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확률과 우연, 무지와 순진성, 우연한 사건, 거침없음에 의해 작동된다고하는 니체의 가르침은 불경스런 말이 아니라 축복의 말이다. 뒤샹, 존 케이지, 백남준은 그것에 있어 대가들이었다. 백남준은 평생 선형적 ‘시간’의 흐름과 그것을 거스르는 창조적 사고, 기억, 표현 행위를 병치시키는 일에 혼신을 기울인 작가다. 백남준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내게는 원칙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저 길이 비어 있으면 갑니다.” 그는 황무지에 가장 먼저 당도하는 잡초들(乙)을 따라 어디든 가는 유랑자였다. 그에게 모랄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나 질적인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잡초들의 쉼없는 반복, 변화, 생성하는 삶 자체에 있고, 그것은 백남준 예술의 참된 본성이라 본다. 마찬가지로 백선생의 예술 처럼 전시에 에너지와 정보를 압축적으로 개입시키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비선형적이 될 수밖에 없다. 

2. 그러나 그 페스티벌은 일련의 ‘지역 페스티벌’에서 볼 수 있는 흥겨움이나 화려함은 없었다. 오히려 장엄하고 무겁게 느껴졌는데. 
전위주의 운동의 기수로서 숭고함이 묻어 있어야 하고, 그 이면에 가벼움과 유쾌함과 개방성이 그를 아름답게 해야 했다. 일단 이번 행사에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문화 산업 논리와 깊히 연관된 후기의 백남준 예술은 일단 배제하고, '청년 백남준’의 가히 천재적인 발상과 빛나는 열정을 마음껏 부각시키고 싶었다. 따라서 비디오 조각 보다는 유동하는 창조적 사유와 돌발적 행위의 생동하는 측면을 전달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주동해서 독일어로 헤겔과 니체의 저서를 친구들과 읽으며 대화하는 모임을 종종 가졌다고 한다. 백남준은 니체를 즐겨 읽었고 그 자신 매우 니체적이다. 모든 것이 이미 다 드러나고 표현된 지금 예술에 있어 마지막 남은 과제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백선생은 간단히 아름다움이라 말했다. 아름다움은 가장 어렵다. 이번 전시에서 이런 특성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코 자신의 후원자 장 피에르 빌헬름의 사망 이후 그에 대한 백남준의 오마주 퍼포먼스 작업이다. 살아있음 자체에 대한 고마움,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의 기쁨, 피로, 하품, 심기 일전하여 점프해 보기, 그를 흉내내기, 길을 건너기, 하늘 한번 바라보기 등으로 이뤄진 흑백 사진 연작. 만프레도 레베가 찍었다. 또 하나 작품을 든다면, 비엔나 행동주의 예술가 오토 뮐이 감독한 영화 <Back to fucking Cambridge>에서 백선생이 작곡가 안톤 베베른에 대해 연기를 하는 단막극이다.
돼지우리 안에서 피아노를 치며 하녀와 성적인 농담과 유희를 즐기는 그 모습이 대단히 유쾌하고 천진난만하다. 백남준을 사상가로서, 그리고 창조 교육의 아버지로 조명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미술 시장에서 스타로 부각되기 이전의 백남준의 내면과 그의 통찰력을 건너질러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에게 덧씌워진 신비화의 거품들을 벗겨내는 작업이 요구된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백남준을 관통하는 유머와 번득이는 기지를 충분히 살려내기에는 턱없이 시간과 능력이 부족했고 본인이 너무 격렬하였다는 한계가 있었다. 유머와 놀이는 예술의 혼이라 함에도 불구하고...  

3. 페스티벌 제목 ‘Now Jump'의 의미는 무엇인가? 잘 보면 ‘NJP'가 보이더라. 
페스티발 제목은 몇 차례 변경되었다.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문구인 ‘무한광명/무한수명’, 파리에 있는 루스벨트 거리의 명칭을 따서 지어낸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보내는 성명서’, 마지막으로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지금 점프해라’ 등. 그러다 간단히 Now Jump로 정해졌는데 흥미롭게 우연히 그 안에서 N. J. P를 발견했다. 두개의 알파벳 글자를 간격으로 해서 음운이 딱 맞아 떨어졌다. 이것은 존 케이지가 피네간스 웨이크의 난해하기 짝이 없는 글 속에서 마르셀 뒤샹과 제임스 조이스의 영문 글자를 찾아내 표식을 한 것과 일치한다.   

4. 페스티벌을 기본적으로 ‘스테이션 1~5’로 나눈 점, 좀더 세부적으로 스테이션 1을 ‘12음계’로 구성한 점이 흥미롭다. 
스테이션(Station)은 백남준 예술의 핵심어. 백남준이 무명 시절에 쾰른에서 한때 조수로 일했던 라디오 스테이션이 영감의 원천이었고, 1984년 대도시의 스테이션을 연결하여 단번에 2천 5백만 시청자를 겨냥했던 <굿모닝 미스터 오엘>이 백남준 예술의 최대 승부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테이션은 방송국 외에 정거장, 발전소, 연구소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어 향후 NJP 아트센터가 해결해 가야 할 많은 과제들을 오각형 마운트의 스테이션으로 정리하였다. 스테이션1- 백남준의 예술 정신과 문화적 유산(상설 전시), 2- 사운드 아트와 실험극 또는 퍼포먼스, 3- 미디어 아트, 4- 딤론 생산, 5- 2009년부터 시작될 백남준아트센터상 개최. 첫 전시를 12음계로 구성해 스토리를 엮어 넣은 까닭은, 백남준 예술의 바탕이 신음악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고전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피아노가 비명을 지르게 만든 것은 독일 국민 모두에게 대단한 충격이자 잊을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선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중에 그는 1930년대 음악에서 중요했던 인물은 쉔베르크가 아니라 오히려 루이 암스트롱이라 수정하기도 했다. 음을 발생시키는 행위는 대지와 우주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정하는 적극적인 생명 활동이고 ‘역사적 선험’을 개시하는 창조 행위의 출발이다. 예술의 기원은 니체와 들뢰즈가 논증하듯 음악에서
출발한다는데 공감한다. 
   
5. 개관식 때부터 미술관 밖에 알 수 없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얼핏 태극기의 색깔인 것 같기도 한데. 
소리는 볼 수 없으므로 영역에 대해 경계를 표시할 수 밖에 없다. 센터 중앙에 휘날리는 깃발은 로두스 섬인 ‘백남준 나라’의 기이다. 근대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구성하는 네가지 색의 면적비를 계산하여 태극과 괘의 형태를 스트라이프로 해체했다. 개관 페스티발은 백남준 아트센터가 나갈 방향을 예시하고 싶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마니페스토’라 해도 좋을 것이다. 

6. 미술관이라는 본격적인 인스티튜션의 수장을 처음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무엇을 가장 하고 싶었나? 
글쎄... 백남준아트센터의 관장이 된다는 생각은 제로 퍼센트였다. 본인에게는 문화비지니스 차원에서 93년 휘트니비엔날레를 한국에 들어온 당시의 맥락을 비판적으로 보아온 사람으로 상업주의와 문화권력을 정면에서 비판해 왔다. 데이빗 로스는 깨끗하지 못하다. 백선생 주변에 워낙 특별한 전문가들이 많고, 미술관장은 인맥과 나이, 외교적 수완과 정치력에 좌우되는 자리니까 자의반 타의반 미술계 ‘왕따’로 살아온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하지만 갑자기 의욕이 생겨났는데, 국내에 본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복합적인 현대미술관이 아직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현대예술에 대한 엄청난 관심과 에너지의 폭증 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미술관 제도는 너무 낙후하다. 인맥과 정실주의,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지자체에서 아무리 미술관을 지어봐야 생겨나자마자 주저앉거나 고사할 지경이다. 관장직 제안이 오고 갈 때, 새로운 과제가 앞에 던져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예술계가 오랜 고립과 상호질시의 시대를 넘어가는 문턱. 그것은 국제화의 실질적 방안을 통해 판을
새롭게 짜는 일이다.
     
7. 그것은 아마도 그간 한국미술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인스티튜션의 시스템을 보아 오면서 아쉬웠던 부분에 대한 일종의 대안 제시일 듯하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어떤 방향을 생각하고 있나.
누구라도 삶의 실존적 드라마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 창조적인 '문화 매개 공간'을 목표로 한다. 백남준의 비디오 조각이 아니라 그의 사유와 행위를 핵심으로 비디오와 미디어 아트에 국한되지 않는 국제적인 복합 문화 센터. 백선생은 유언에서 미술관의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데 매여서는 안되며 혈기 왕성한 젊은 작가들을 키우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비영리적 목적의 큐레이토리얼 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탐구하는 국제 큐레이터 육성 기관. 국제화 시대에 큐레이터는 지식, 경험, 언어, 마인드에 있어 전방 공격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전시제작자'로서의 큐레이터는 한국이나 외국에서나 드물다.

8. 국제 큐레이터 양성을 위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자임하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
맥루한의 관점은 흥미롭지만 미디어 아트 작품은 재미가 없다. 동양 철학의 관점들이 흥미롭지만 동양화가 재미없는 것과 같다. 백남준을 요즘의 뉴 미디어 아티스트로 국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60, 70년대 서구의 지적,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전위적 사고와 과감한 예술 행위가 훨씬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 미디어아트 전문가도 이제는 필요한 때가 되었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국내 큐레이터의 활동이
전혀 국제라는 벽을 넘지 못하는 과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비행기들(작가들)만 있고, 제대로 된 활주로(큐레이터)가 없으니 온통 사고투성이다. 외국의 지명도 있는 큐레이터 그룹 속에서 인정받는 국제 큐레이터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지금까지의 한국 미술계의 구조 안에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글로벌 시대에 소통될 수 있는 프로토콜을 무시한 채 누구나 큐레이터를 자칭하는 아마추어리즘, 그것을 조장하는 미술계 구조로부터 일단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9. 미술관의 교육적 기능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으로 간주되어왔지만, 일반 관람객이 아니라 정작 예술가들이나 평론가/큐레이터들을 위한 교육적 기능은 간과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매달 2회의 강연을 개최하며 정기적으로 세미나, 심포지움 등을 가질 것이다. 대학원생 이상 연구자들, 활동가 중심으로 멤버쉽 제도를 운영할 생각이다.

10. 전례 없는 미술관 운영 방식에 대해 국내에서는 낯설게 받아들일 듯도 하다. 오히려 해외에서 온 주요 인사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센터의 미션에 대해 상당히 흥미로워 하며 이번 전시 공연 행사에 대해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성공적인 출발이라 생각하지만 지속성이 문제다.

11. 관장 수락 후, 전시 기획보다 전시 공간으로서의 미술관 내부를 갖추는 데 힘을 쏟았다고 들었다. 전시 공간으로서의 미술관 내부의 실내 건축과 디자인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시간, 비용이 위급할 시에는 집 주인 대리가 나서서 디자인할 수 밖에 없기도 하지만 미술관 사용자의 철학과 개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완전 텅 비어 있던 아트센터 내부 공간을 한옥 전문의 목수와 낮밤을 새워가며 1달 보름 여만에 끝냈다. 참고로 영주 부석사의 사찰 건물과 안동 서원 건축들에 대한 현지 탐사와 공간 디자인 연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전 세계에 3개의 에디션만 있는 아트센터 소장품 <TV 가든>을 백남준아트센터의 중앙에 영구 설치물로 배치했다. 워낙 실내 공간이 작아서 관객들 사이에 착시 거리를 만들려고, 가든의 형태를 음지 식물 중심으로 원시 정글 을 만들었다. 조경가의 철저한 기술 자문을 받아가며 직접 조경디자인을 했고, 수목원을 방문해 식재를 선택했다. 1주일 안에 완성되었고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2001년 경기도와 백남준 사이에 계약이 체결될 때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 명명했는데, 바로 그 집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마음에 드는데 과연 백남준이 얼마나 좋아할까.. 

12. 좀 전에 인터뷰 시작하기 전에 보니까, 페인트 색깔까지 참견하더라. 관장님이 너무 세세한 것까지 참견하면 일하는 사람들이 싫어할 것 같다. 
관장이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관장이 예술감독으로서 행사 전체를 큐레이팅했으니까 세부는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비선형적 복합 구조를 좋아하며, 소탈하면서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일할 때는 평소와 달리 헐렁한 것을 인내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13. 공무원들과 일하면서 힘든 점은?
일을 할 때 공무원들은 흑백이 분명하여 차라리 낫다. 학예 파트에서건 행정 파트에서건 어설픈 민간인 전문가들이 항상 문제다. 12년전 광주비엔날레 당시 공무원들과 트러블이 많았다고 좀비들이 소문을 퍼뜨렸는데, 실상은 이권을 둘러싼 전문인들의 이해 다툼과 정실주의가 저지른 일이었고 지금도 다를 바가 없다. 소아병, 협잡, 배제… 등.

14. 학예실장과 홍보팀에 외국 인력을 투입했다. 공공 기관에서는 파격적인 인사였을텐데. 
현장 경험이 많은 두명의 외국인 큐레이터를 고용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해보는 일이다. 더우기 학예실장을 외국인 큐레이터 가운데서 스카웃해 왔다.
그는 카셀 현대미술관(프레디시아눔)에서 르네 블럭 밑에서 5년간 큐레이터로 일을 했고 국제전 경험이 많다. 그외에 커뮤니케이션학, 예술철학, 미술사 등을 공부하고 런던 RCA 큐레이팅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등에서 일을 했거나 외국의 유수 큐레이터 코스를 마친 잠재력이 탁월한 젊은 큐레이터들도 있지만, 모두가 어시스턴 큐레이터의 직위로 한정했다. 큐레이터의 위상을 좀더 높게 좀더 엄중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다. 내부에서 반발이 상당히 있었다. 영어로 회의를 하고 토론하고 서류를 만들어가는 그 변화 과정이 중요하다. '국제’혹은 외부와의 연결을 내부의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적당히 이용하고 버리는 배타적인 시스템과 닫힌 마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백남준은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출생해 평생 유랑자(Nomad)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미국 국적의 예술가이다. 백아트센터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미술기관들이 외국인 전문가를 직원으로 고용하는 시기가 앞당겨져야 한다.     

15. 전시장 초입에 있는 중국작가 왕싱웨이의 그림과 바로 옆에 놓인 유년 시절의 백남준 사진이 묘한 대칭을 이루는 듯하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연결시켰는가? 
백남준을 단순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표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르셀 뒤샹을 정점으로 백인 남성 중심의 유럽 미술과 역사의 전문 분야 바깥으로 나가는 비좁은 출구에 백남준이 당당히 서 있고, 이는 백남준 자신이 '초인적' 발상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돌파해 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왕싱웨이 유화 그림에서 보듯이 뒤샹의 <거대한 유리>를 시원하게 깨버린, 즉 그 신화 구조에 큰 구멍을 내버린 동아시아의 어린 소년(인민군 복장을 한 개구장이)이 바로 백남준 자신이었다는 것을 하나의 질문으로 던지며 전시를 시작해본 것이다.

16. 정작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에 백남준의 작품은 많지 않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잘 보면 실제로 그렇지가 않다. 백남준 퍼포먼스 이미지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고, 오토 뮐 영화에 배우로 출현한 백남준, 후쿠이 방송국에서 촬영한 백남준의 일본 영평사 참선 장면 등은 새로운 발굴이다.
다만 백남준 비디오 조각 작품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뿐이다. KBS 방송국에서 했던 최근의 전시는 완전히 비디오 오브제와 설치 중심의 전시였다. 한국에서는 지난 15년간 백남준을 '비디오 패티쉬(物神)'의 대가로 만들어 대중화했을 뿐이다. 84년 이전 백남준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내에는 사방에 백남준 이름을 단 졸속 조각들이 넘쳐나고 있다. 개중에 명품도 많지만 이번 행사에서는 백의 비디오 조각은 단 한점도 외부에서 빌리지 않았고, 전시에서 중요하게 다루지도 않았다.   

17.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갖고 있는 소장품 규모는 어느 정도 인가? 
비디오 신시사이저, TV 정원, TV 달, TV 시계, TV 부처, K-567 로보트, 몽텐블루, 코끼리 카트, 삼원소(레이저 작품), TV 스테이션(레이저) 등 67점의 작품과 퍼포먼스 흑백 사진들을 포함하여 200여 점의 각종 자료, 굿 모닝 미스터오엘 등 대표적인 영상 작품들을 포함하여 약 2,3000개의 영상 자료들이 있다. 기본은 되는 셈이지만 매년 꾸준히 컬렉션에 신경을 쓸 계획이다.   

20. 뉴욕 쪽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자료 구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들었다. 심지어 ebay를 통해서 헌책을 구해서 볼 정도였다고.
뉴욕의 백스튜디오는 도움은 커녕 계속 일을 방해했다. 흠집을 잡아 파워를 행사하려는 태도와 아트에 대한 지나치 몰이해로 스튜디오가 백남준의 위업을 깍아내는 일을 하지나 않을까 우려가 된다. 회심이 필요하다.      

21. 인터뷰를 하며 느껴지는데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관장님께서 백남준의 팬이 되신 것 같다. 사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이번 행사에서 특이한 점은 기존의 ‘백남준 전문가’들보다 그동안 백남준을 잘 몰랐던 사람들로 하여금 백남준의 예술성을 깨우쳐주었다는 것이다
과찬이다. 청년 백남준의 지성과 고민을 순수한 마음으로 음미하며 시간의 결을 거슬러 여행하고 싶었다. 60년대 초 절대 빈곤국에서 온 무명의 백남준이 백인 남성 중심의 예술판에서 가로지르기를 행하는 그 과정이 짜라투스트라를 닮았다.     

22. 이번 전시에서 일본 전자공학자 슈아 아베의 등장이 눈에 띈다. 
그는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관계가 아주 소원하게 여겨졌던 1963년 무렵 동경에서 백선생을 만나 작고할 때까지 평생의 친구로서 지냈다. 만주사변(1931년) 직후에 태어난 그는 백남준과 동년배로 참으로 맑은 인물이다. 1960, 70년대 백남준이 그에게 보내온 많은 서신들과 기타 자료들을 센터에 서슴없이 기증해 주었다. 참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이번 전시에서 백남준과 슈아 아베의 관계를 부각시키는 코너를 만들었다.   

26. 위층에서 바라본 신갈고 전시장은 마치 감옥 혹은 노아의 방주 같은 인상을 받았다. 혹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아트씬에 대한 개인적인 스테이트먼트는 아닌가?
예술가들이 상업주의와 직업전문가주의(좀비)의 그물에 포섭되어 너무 일찍 살해당하는 것 같다. 출구가 없다. 그래서 과거를 재활성화하는 전시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태리 공연 연출가 로메오 카스텔루치가 이번 페스티발을 위해 신작을 만들었는데, 제목은 <천국>. 어두운 방 안의 벽면 상단부에 한 남자의 상체가 벽체에 뚫린 구멍에 꽉 끼여진 상태에서 틈으로 물이 세차게 품어져 들어오는 퍼포먼스 설치 작품이다. 고통받는 한 인간의 도움으로 구멍난 배가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잠시 멈추어진 상태다. 천국은 죽어서 가게되는 영혼의 쉼터가 아니라 한밤 중에 배에 구명이 난 비상 사태의 국면에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노아의 방주에 구멍이 나 있고 자신이 그 구멍에 몸이 반쯤  끼워진 한계 상황이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27. 또한 그곳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배치한 이유는?
미디어가 확산되어 갈수록 통제 사회는 조밀해져 간다. "기술을 증오하기 위해 기술을 취한다"는 백남준의 경구는 통제 사회에 대한 적절한 은유이다. 체육관 건물의 전시는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한 접근이었고, 그곳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배치했다.    
 
28. 스테이션2의 퍼포먼스들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아무래도 전문 공연장이 아니어서 실제로 힘든 점이 많을 것 같다.
24개의 퍼포먼스 팀이 참가하였다. 공연분야에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계원대 김성희 교수를 감독으로 하여 일을 맡겼다. 미술관 안에서 전시와 공연을 결합하는 일은 예술의 '수행성(Performativity'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흥분되는 점이 있지만 그 댓가를 치러야 하는 일도 많다. 프로그램은 대단히 훌륭하였다. 
 
29. 반대로 관객 입장에서도 퍼포먼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좀 낯설다.
낯설고 생경한 것은 오히려 좋다. 문제는 전시와 좀더 긴밀하게 얽혀들기에는 소음, 조명, 공간의 스케일 등이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30. 스테이션 4, 5에 해당되는 국제 심포지엄 및 워크숍, 저널 발간, 시상 제도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2월 4일부터 3일간 국제심포지움이 있을 예정이다. 바전 브럭,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부르노 라투어, 존 라이크먼, 미크 발 등을 초청하기 위해 접촉 중에 있다. 2009년 사업 계획으로 정기적인 국제저널을 발간하려고 한다. 그리고 백남준아트센터상을 시작할 것이다. 대상은 전세계 아티스트이다. 분야는 미디어에 제한하지 않을 것이다.
 
 
 

2008/12/30 14:17 2008/12/3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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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wlgP 
wrote at 2010/11/11 18:23
dks ahk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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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the background of the exhibition which was held in Vienna not as large-scale nation-to-nation friendship exchange but as an independent exhibition? And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this exhibition and large-scale friendship exhibitions like ARCO Art Fair?
The background is our private relationship with Korea (me Seung-duk Kim as a former Korean?exiled in the West, and me Franck Gautherot as a pure amateur of Korean chaotic society and culture). In this way, it is obviously a non-official nation oriented exhibition, which gives us a moment of strict freedom to compose it. The ARCO show we don't know and we haven't been there. The only thing we knew was the problematic situation with the former curator and the official structure...

The theme of the exhibition sounds profound in its meaning. What does 'Elastic Taboo' means?
Don't worry it is not as profound as it could be. It is just an exhibition and not a thesis on Korean sociology or what ever. In a recent italian article published on our show, the title was: " In Korea, taboos are elastic". They got the point. In your country the taboos are strong but relative and changing. In the art scene, we saw the powerful monochrome school beated by the post minjun movement as the favor of political changes. And an emarging scene of younger artists who didn't want to be placed in any drowers like these, but found their autonomy somewhere there. Also we used the taboos issues for ourselves too. Curating a national show is supposed to follow some rules or proceedings, or some strong orientations: new artists fresh to be consumed by the market, or a survey with one work by each artist, or any other bureaucratic process to compose a show. We disn't want to do like that and we decided to find other solutions and mix for instance different generations under different displays.

Elastic Taboo is an exhibition showing the trend of the Korean contemporary fine art. It is not exaggerating to say that it was organized in a context of the 'Korean contemporary fine art history'. Why do you set the starting point of the history at Lee Woo-hwan and Park Seo-bo?
Fine art history is a way to score a situation. And why Korea couldn't be so?
We started the history with Park Seo-bo and Lee U-fan because we like them and their works. But we selected Park Seo-bo because his way of doing the monochromatic is rather fresh and direct. And in this way we could have add to his paintings the soundtrack of Bubblyfish music to design a room of joyful pleasure and childish meditative playground. Lee U-fan was selected because his work resist to any curator narrative and stand for itself in his pure self-consciousness of pride.

Why did you invite not only pure fine artists but also film director and musician to this exhibition?
We did invite film directors because the Korean cinema is strong and good and popular and also could provide the social context in this show. But also some private stories came behind this choice. The best is to read our essay for the catalog where the subtext of this show is patiently described.

We can find a narrative desired by the curator on the circulation of the exhibition starting from the works by Chang Young-hae Heavy Industries and ending up with Baik Hyun-jhin's. What contents were contained in the narrative?
The narrative is a way to give a possible clue to the viewer. It is our decision and proposal but any other reading is welcome as well.For our point of view the starting point was the Chang Young-hae Heavy Industries commisioned work. It is a sort of nightmare when you woke up as a Korean after a drinking party. And then from that point everything starts. The Korean urban environment is given by the Choi Jeong-hwa street banners and the faces by the wall paper-like photographic images by Kim Han-young.
This is outside the main exhibition rooms. And from the entrance of the show we stayed in a pure a-bit-traditional art exhibition of paintings and sculptures, photos and a touch of video.

It seemed to be unique that Park Seo-bo's works were displayed together with the game boy musician Bubbly Fish's works. What effects did you expect of such a cross-encounter between the two?
We thought of this combination quite early in our curatoring process. We did experienced a similar thing for the 2005 Valencia Bienial in Spain where we asked the American musician Arto Lindsay to compose a soundtrack for the whole show. It turned out so successful and good that we wanted to redo stuff like that. The paintings of Park Seo-bo are open enough to welcome a music to be played over them.And the childish deeply serious Gameboy music by Bubblyfish was particularly adapted for that. In a way it turned the paintings into vast open cinematic landscapes.
As said, we came to this idea of inviting Bubblyfish to soundtrack Park Seo-bo paintings quite early in the preparation of the show. What we expected was something sensitive and that goes beyond verbal. Just a music to be combined with paintings that we figure opened enough to welcome that type of superimposition. And it worked quite well. The discreet but efficient music turned the paintings into some kind of cool quiet landscapes, colorful and peaceful.It could have been?suspected as a critical comment on the "mundane" monochromes by Park Seo-bo, but both of them, the painter and the musician felt it as an honour and were pleased to be associated in it. Meeting of different generations with mutual interest?and respect.

Explain about the new works for this exhibition such as Choi Jeong-hwa's and Chang Young-hae Heavy Industry's.
In any show, it is always nice to commission and produce new works. So we selected few artists and asked them.
Chang Young-hae Heavy industries and Choi Jeong-hwa were asked on purpose to design pieces as introductory to the show, providing for the one, a text prelude and a visual environment for the other.
The banner pieces by Choi brought a visual information around urban chaotic context while the new work by Chang Young-hae HI is drawing the introductory narrative. It comes as a way to put the viewer into a Korean body, seen as an alien in his own body. From that it could start to travel into the Korean world of contemporary art.

Why did you manage to have Lee Kang-so's chicken performance represented despite it was performed for Paris Biennale?
Bringing historical pieces like the Lee Kang-so chicken floor/flavour painting was very important for us. As a sort of nice funny comment on a pre-relational aesthetics era where for biennales some young artists were doing such performing works that are still vivid and accurate to be recreated today. 
Lee Kang-so chicken painting was in itself a sarcastic comment on Gutai-like work and on informel fashionable paintings of the time.
It was fresh, straight to the point and good.
He nicely accepted to recreate it for the show and it is presented along with another painting (hung on the wall) depicting ducks (echoing the chicken!).

(To Kim) As a curator primarily engaged in overseas exhibitions, how do you feel for the Korean contemporary art trend? Do you think you have a viewpoint different from those curators primarily engaged in the Korean events?
If I do have a different point of view from other Korean curators, it is only because of the context of such a show and also because I feel totally free from any schools, any groups, or any power oriented territory. I never look at artists within a national context.

(To  Gautherot) There are opportunities in
creasing for exposing the Korean artists' works in Europe. In your opinion, how much is the Korean fine art exposed to Europe? And how do you distinguish the Korean fine art from other Asian nations'?
I don´t give much of a dam about the exposure of Korean artists in Europe and I don´t care if they deserve more exposures or not. I was interested to collaborate in such a show because of specific reasons.
If I distinguish Korean art from other Asian nations: yes I do, but I don´t know if it is good or bad. The things I know about Chinese artists don´t push me to be much involved in it. Japanese neither. But Korean I feel rather exotic but friendly and confortable for me to deal with.


(To  Gautherot) This exhibition may have provided for an opportunity to approach the Korean fine art more closely and analyze it. On the other hand, I suppose that the contents analyzed were reprocessed to suit Europeans' viewpoint and shown to them. How do you think about such a supposition?
It could have been always different but it is the way we decided it should be. We didn´t want to analyse too much. It came from our point of views and we didn´t have any will to predigest the show to fit European expectations on Korean art. We simply did our way and when we do a show, we basically and firstly do it for us, for a better understanding, for our own pride and feeling. After comes the strategy to address to the audience. But fat irst we are the first spectators.

We wonder how both of you curate the exhibitions? And you are a couple of European and Korean who curated exhibitions in Korea and Europe.
Yes baby we are a couple, a mix of Korean/French active in this funny world of contemporary art and we do like it and we do enjoy working together, mixing our privacy with public activity. It is a constant dialogue, exchange, and fights. And love.

What made you difficult in actually organizing the Korean exhibition? For example, have you ever faced a difficulty in selecting the artists because of the sectionalism of the Korean fine art community? And didn't you feel that the supports from embassy or culture center were poor?
No difficulty to select the artists. We didn´t feel we have to invite this one or that one, it was more the opposite when we told we will invite for instance Park Seo-bo and Shin Hak-chul or Choi Min-hwa and Lee Kang-so. People were thinking we were a bit crazy to mix ennemy brothers with younger kids. And some of these young kids refused to participate after hearing those names. Young blood are sometimes a bit weak and fragile and not confident enough to themselves to overwhelm such a situation. Too bad for them, they miss something to our point of view.
About financial support from Korean official agencies: we got some, and we were pleased of it, but at first the Vienna Kunsthalle was the best support -in every aspects, be financial and intellectual-. We are used to be independent and through our experience with the Consortium, we know the price to pay to stay independent and to keep your own freedom. It means little support. We guess our support was far not as?comparable as the one ARCO (Spain) get for their commercial-context-exhibition.

What were the audience's responses to the exhibition at the time of its opening or Vienna art work?
The show is fully well received in Vienna and got a lot of press coverage nation wide and abroad. It was opened by Austrian president. But now to know exactly what people think of it, it stays mysterious as usual.
We had a good time doing it and we felt we accomplished our mission.

(To Kim) I know that you were the first Korean who curated such a Korean exhibition on a full scale. We guess your personal sentiment was quite deep and mixed.
Yes it was the first time I did such a show, and for me it was a good occasion to overview the Korean contemporary art situation. I may not do it too many times. I didn´t want from the beginning to be associated with a national label as some Chinese did for instance.
I am happy to consider art as some human occupation that goes far beyond nationalism and limited boundaries. And if I went to this field it is also because of that. Freedom, openess, internationalism and lot of fun.

We've heard that you will curate APAP scheduled for this autumn. Do you have other schedules related to Korea? Then, what will be your roles for them?
Yes we have been asked to work as co-commissioners for the next APAP. It is another challenge, very exciting and difficult because it is a direct confrontation with a real urban living situation. It is an under process labor, full of contradictions and bureaucratic conflicts but on-going. 
We are not fully free and responsible?to do our way but it is a sort of collaboration?done from Paris. But we will come for the opening.

What do you think of '교류' in the contemporary art?
교류 is really depending of currency rates. Sometimes you get more, sometimes less. But you had to leave a percentage to the broker.
2007/06/15 00:27 2007/06/1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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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전시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김승덕(이하 김) 한국에서는 금기가 많지만, 반면에 그 가치판단의 기준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제가 주는 인상만큼 너무 심오하게 받아 들일 필요는 없다. 이 전시는 결코 주제를 부각시키려는 테마형 전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시 방법론상의 금기를 깨고자 했다. 국가 중심의 전시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전시 방법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대개 국가 전시는 어떤 분명한 성향 하나만을 주제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기획되곤 한다. 혹은 시장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신선한 작가들을 소개하거나, 백화점 식으로 진열해 작품들이 ‘샘플용’으로 보인다. 또 관료적인 절차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는 전시들도 많다. 우리는 그런 전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을 서로 혼합시키면서 기존 국가 중심의 전시와는 다른 새로운 전시 방법론을 찾았다.
art 〈엘라스틱 터부〉전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다. 일종의 ‘한국 현대미술사’를 압축한 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역사의 시작점을 이우환, 박서보로 둔 이유는 무엇인가?
프랑크 고트로(이하 프) 미술사는 어떤 상황을 평가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한국의 현대미술사는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모던/포스트모던 시기를 지나면서(그것도 서양 기준으로 발전된 상황으로), 그리 간단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작가 박서보, 이우환과 그들의 작품을 좋아해서 그들로부터 한국의 미술 역사를 출발시켰다. 좀더 이야기하자면 박서보의 모노크롬 작품이 다소 신선하고 직설적으로 보여서 그를 선택했다. 또 이우환은 기획전 안에서 그의 작품이 큐레이터의 내러티브 안에 포함되기를 거부하곤 하는데, 그것이 그의 순수한 자긍심을 드러낸다.
art 작가를 선정할 때 한국미술 특유의 파벌주의 때문에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작가를 선정하는 데는 어떠한 어려움도 없었다. 우리는 이 작가와 저 작가를 함께 엮는다는 점에서 전혀 부담을 갖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박서보와 신학철 또는 최민화와 이강소를 함께 초청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다른 유파의 작가들을 섞고, 늙고 젊은 작가들을 뒤섞는 것을 보고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부 젊은 작가는 다른 기성세대 참여 작가 명단을 듣자 전시 참여를 거부했다. 젊은 혈기의 작가는 때때로 약하고 무르며, 이러한 상황에 맞설 만큼 충분히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자주 없는 기회를 놓쳤고, 무엇보다도 이 전시의 포인트를 전혀 간파하지 못한 것 같다. 이 점에서 그들이 매우 안됐다고 생각한다.
art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했던 이강소의 닭 퍼포먼스를 재현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닥에 밀가루로 그려진 ‘치킨 페인팅’은 역사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다. 이강소의 이 작품은 니꼴라 부리오의 ‘관계성의 미학 (Relational Aesthetics)’을 훨씬 앞서 예보하는 듯하다. 이강소의 ‘치킨 페인팅’은 구타이류의 작품들이나 30여 년 전 유행했던 여타의 유행하던 회화들에 관한 풍자적인 논평이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이 비엔날레에 출품하는 세태에 관한 이강소의 멋지고 재미있는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재현 되도 여전히 신선하고 얘기가 될 수 있을 만큼, 그의 작품은 신선하고 의도가 분명했으며 훌륭했다. 그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치킨 페인팅’ 재현해 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고, 이 작품은 오리를 묘사한 그의 다른 그림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art 장영혜중공업의 작품으로 시작되어 백현진의 작품으로 끝나는 전시 동선에서 큐레이터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러티브가 발견된다.
내러티브는 관객들에게 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내러티브는 우리가 결정하고 제안했지만, 또 관객들이 그와 다르게 읽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 전시의 시작점은 전시장 외부에서부터다. 마치 전주곡처럼 말이다. 이 전시를 위해 주문 제작된 장영혜중공업의 작품은 어느 외국인이 폭음 후 잠을 자다가 깨어나보니 한국인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는 일종의 악몽을 그리고 있다. 전시장 창밖으로 보이는 최정화의 거리 현수막 설치 작품은 서울의 도시적 환경을 표현한 것이고, 반세기 넘게 한국인의 인물사진만 찍어온 김한용의 광고사진 이미지들을 벽지처럼 이어 붙여 전시장 입구를 덮어 버렸다. 주 전시장 입구는 박이소의 <오공계>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우리 나름대로 무언의 언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박이소라는 작가는 기성 세대와 무관하길 원하는 신세대 작가들 사이에서 ‘잃어버린 영웅’으로 존재하는 듯하나, 그의 작품은 앞으로 해결되야 할 여러 가지 미지수를 남기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불가사의한 인상의 이 작품은 관객들을 전시장으로 인도하면서 매우 적합한 이야기를 던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번 전시는 요즘의 신선한 흐름을 보여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순수회화 작품과 조각 작품 그리고 비디오 작품을 매우 고전적으로 배치했다.
art 박서보의 작품과 게임보이 뮤지션 버블리피시의 작품을 함께 설치한 것이 독특했다.
우리는 기획 과정의 초기부터 이러한 콤비를 구상했다. 이미 우리는 2005년 스페인의 발렌시아비엔날레에서도 유사한 경험을 했는데, 당시 우리는 미국의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아토 린세이에게 전시회 전체를 위한 사운드트랙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고 훌륭했다. 우리는 박서보의 그림을 보는 순간, 음악적인 요소를 가미한 공간을 연출하고 싶었다. 박서보의 그림은 현대적인 음악이 곁들여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개방적이다. 그리고 버블리피시의 천진난만하면서도 매우 진지한 게임보이 음악은 박서보의 작품에 적합했다. 불연속적인 효과음은 박서보의 그림을 차분하고 조용하며, 화려하고 평화로운 또 다른 ‘랜드 스케이프’로 변모시켰다. 이러한 시도는 박서보의 ‘세속적인’ 모노크롬에 대한 비판으로 의심받을 수 있었으나, 화가와 뮤지션 모두 그러한 시도를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기꺼이 허락했다. 서로 관심을 갖고 존중하는, 다른 세대의 작가 간 만남이었다.
art 영화감독이나 뮤지션 등을 참가시킨 이유는?
한국 영화는 강하다. 좋은 작품이면서도 인기까지 많은 이유에서 한국의 두 영화감독을 초청했다. 동시에 그들의 영화는 전시에 사회적인 문맥을 부여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우연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개인적인 스토리가 있다. 도록에 실린 우리의 에세이를 읽어보면, 이번 전시회의 내러티브 내부에 흐르는 비가시적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art 둘이 함께 큐레이팅하는 과정이 궁금하다. 그것도 유럽인과 한국인 커플로서 한국 전시를 유럽에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김/프 맞다. 우리는 하나의 커플이다. 이처럼 재미있는 현대미술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프랑스인 커플이다. 우리는 협력을 좋아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프라이버시와 공적인 활동을 혼합하면서 함께 일하기를 좋아한다. 우리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대화와 의견의 교환, 그리고 충돌이 있다. 그리고 물론, 사랑이 있다.
art 한국 전시를 본격적으로 기획한 것은 처음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그렇다. 내가 이런 전시회를 기획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로서는 한국의 현대미술의 상황을 조망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앞으로 이런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나는 국제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일부 중국 큐레이터들과는 달리, 전시회와 국가가 연관되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미술이 민족주의와 국경을 뛰어넘는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미술계에 발을 들인 것도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자유, 개방성, 국제성, 그리고 큰 재미가 바로 내가 정의하는 미술의 특징이다.
art 동시대 미술 현장에 있어서 ‘교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교류는 환율과 같은 것이다. 어떤 때는 더 많이 얻고, 어떤 때는 덜 얻기도 한다. 그러나 중개인에게 줄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닌 ‘커미션’은 남겨 놓아야 한다.
art 올 가을에 열릴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APAP)에서 큐레이터를 맡았다고 들었다.
김/프 그렇다. 우리는 다음 APAP의 공동 커미셔너로 위촉받았다.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예술 작품과 실제의 삶이 직접 대면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고도 어려운, 또 다른 도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진행 중인 현재의 상황은 이런 저런 모순과 관료적인 갈등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런 힘든 과정 역시 전시의 일부로, 언제나 해결해야 할 현실이다. 그러한 고생의 대가는 우리가 보고 싶었던 작품을 이 기회에 실제로 제작되고, 또 그 작품의 메시지를 안양 시민들과 나눌 때 만끽하는 ‘보람’일 것이다. 특히 공공미술 프로젝트이기에 애물단지가 아닌, 시민에게 사랑받는 ‘선물’이 되길 바란다. 우리의 방식대로 일할 만큼 충분한 자율성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지만, 통신의 발달로 파리에서 거주함에도 불구하고 무리 없이 협력할 수 있다. 우리는 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인터뷰|호경윤 수석기자
※필요에 의해 편집 및 '주관적' 각색을 많이 하게 되었음을 밝혀둔다. 원본을 함께 올리니 참고하시길....
2007/06/15 00:00 2007/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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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박서보를 닮은 할아버지가 바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볼선생이나 나나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는 얼굴에 가식이 뚝뚝 떨어진다. 저 책들고 있는 포즈란!
그리고 인터뷰 내용은 노코멘트다. 작품 <reserved>에 "not reserved"의 상황이라는 말 밖에는...
2007/03/07 11:59 2007/03/0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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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wrote at 2007/03/10 16:41
진짜네! 박서보 선생님과 매우 닮으셨어요.
Say Ho 
wrote at 2007/03/12 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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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세대 헤어디자이너, 단발 커트의 일인자.
지금은 통영에서 중국요리집을 하시며, "쿨한 실버" 생활을 즐기시는 그레이스리 선생님.
http://blog.naver.com/hjw0139?redirect= ··· 10807338

우리를 위해 전날 수산시장에 가서 직접 사온 광어 한마리를 홍콩식으로 요리해주셨다.
계속 무언가를 가르쳐 주심 ^^
2007/01/18 19:44 2007/01/1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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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Kyong-yun,


Here are my responses to your questions"


--
1. What made you accept the suggestion for chief curator for Gwangju Biennale?

When the Gwangju Biennale began in 1995, there were only a handful of biennales or triennials in the world, and no comparable international art events existed in other East and Southeast Asian countries. Today, however, numerous exhibitions worldwide have adopted the fashionable name `biennale'.
The consequences of this phenomenon are two-fold. On the one hand, the term `biennale' has generally lost its original meaning as a large international exhibition held every other year to showcase the most up-to-date development in contemporary art, differing little, in the worse cases, from a commercial art fair or a government-sponsored `national exhibition'. On the other hand, this situation has prompted more adventurous curators to recapture the `experimental' spirit of a biennale by conceptualizing each event as a distinct curatorial project with specific goals, characteristics and structures. Two common features of such `experimental' biennales are their emphasis on the symbiotic relationship with their locations, and their self-professed role in reorienting the theoretical and historical discourse on contemporary art.

These features also underlie the Sixth Gwangju Biennale, whose central theme is `Asia'. By making Asia the focus of representation and interpretation, the exhibition poses two large questions to artists, art critics and the general audience: What is Asia at this moment of human history as seen in contemporary art? How is contemporary Asian art related to contemporary Asia?

Basically, I accepted the invitation to serve as a Chief Curator for this Biennale because I hope to respond to these challenges.


2. I know that you are not as much experienced in exhibition curating as criticism activities. How do you feel for your role as chief curator?

Although I'm not a full-time independent curator, I have organized more 20 exhibitions, including some large ones like the First Guangzhou Triennial, "About Beauty" in Berlin, and "Between Past and Future" in New York and Chicago. The current project requires extensive collaboration with the Korean Biennale team, other curators, and many artists. I find this very exciting. In particular, I am very interested in developing a coherent structure for the Biennale, rather than simply gathering many unrelated works under a single roof. I would like to pursue a kind of poetic quality and convey this quality to the audience. This may reflect my other profession as art critic.


3. What are the specific missions credited to you for this biennale?

See my answer to the first question.



4. Did you participated in the artist selection process? If so, whom did you recommend? And for what reason?

I recommended many names, which were then discussed by the whole team. In particular, since the central theme of this Biennale is "Asia," I am most interested in presenting those artists to  whom  Asia and its traditions do not have a given, objective existence, but must be rediscovered and individualized. Such rediscovery and individualization means active engagement: through constantly redefining Asia and its cultural heritage, these artists also constantly discover themselves and enrich contemporary art in general. 



5. How do you define the Asian stories unfolded in the first chapter?

Every educated person would agree that Asia has never been a static entity, but has constantly acquired new identities and significance throughout history. Its transformation has reached a new level in recent years: with 60 per cent of the earth's population living in Asia, this largest continent currently generates the strongest economic development as well as the most dangerous religious and political tension in the world. Indeed, `What is Asia?' may well be an unanswerable question, because Asia itself defies simple perception and definition. Not only do various Asian countries have divergent cultural traditions and historical experiences, but their present and future also differ. While enthusiastic economists predict that the 21st century will be an `Asian century', Asia is also the site of ongoing, brutal wars, which kill people and destroy their homes on a daily basis.

Just as contemporary Asia is inseparable from international politics and the global economy, its art constitutes a crucial part of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But what is contemporary Asian art? Is `contemporary Asian art' a meaningful concept in art history and criticism? If so, then in what way(s) is this art both regional and contemporary? How is it related to global art? What is its relationship with various Asian art traditions? Once again, these are questions that do not have simple and straightforward answers. But I believe that every historian, critic and curator of contemporary art not just Asian art specialists should seriously consider these issues as they relate to our general understanding of global contemporary art in two ways.

First, contemporary Asian art is no longer confined to a single geographical sphere, nor is it defined by the artist's ethnicity. Not only do many `Asian artists' now live and work around the world, but non-Asian artists, including some prominent figures, have derived ideas and visual vocabulary from Asian art, religion and philosophy. To artists of both kinds, Asia and its traditions do not have a given, objective existence, but must be rediscovered and individualized. Such rediscovery and individualization means active engagement: through constantly redefining Asia and its cultural heritage, these artists also constantly discover themselves and enrich contemporary art in general. Second, people are accustomed to thinking of European art as a `global' art tradition because its styles and techniques have been used by artists from different places to express their feelings and experience. However, a similar international dimension in Asian art and culture has been ignored, even though it has been penetrating both contemporary art and popular visual culture on a global scale. As globalization continues to intensify, such cultural crossing not just from West to East but also from East to West  will undoubtedly play a greater role in the general development of contemporary art.

Through the four thematic sections in the First Chapter I try to respond to these issues.



6. Are your answers conflicting with your personal experiences as an Asian in the United States?

Certainly not. As I have made it quite clear, my understanding of contemporary art in general and Asian contemporary art in specific would natural reflect my own cultural and educational background and my politics.



7. How do you feel for the increasing biennales in the Asian region including Korea?

See my answer to the first question. It can be good or bad, depending on the purpose, nature, and realization of each exhibition.


--
Wu Hung
Harrie A. Vanderstappen Distinguished Service Professor
Director, Center for the Art of East Asia
Consulting Curator, Smart Museum of Art
The University of Chicago

2006/08/06 01:43 2006/08/06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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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체성을 전통을 기반으로 찾아보자 해서 폴리티컬한 측면에서 아시아의 눈으로 세계의 현대미술을 재조명한다는 것이 우리의 캐치프레이즈에요.


의 다됐다가 광주의 폴리티컬한 문제로 좌절을 당하면서 낙심을 많이 했어요.

게다가 폴리티컬리 젠더 스페시픽한 주제를 내세우기는 광주비엔날레에서 아직 이르다고 봐요.

마지막장의 남미쪽에서는 안티 헤게모니라는 미국 임페럴리즘을 주제로 하고.

중국작가가 지금 중국작가냐, 세계작가지, 다 코스코폴리탄이라는거죠.

아시아에서의 클래시컬한 동양문화, 한자문화, 불교문화의 공동점과 차이를 들춰내고 싶었는데.


슈빙은 동양화를 평면으로만 보여주지 않고 2D,3D가 공존하는 랜드스케이프를 보여줘요.


대안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얼터너티브를 만들어내느냐가 문제죠.


첫장 작품같이 솔리드한 작품보다는 마지막장은 영상이나 자료들로 제작비가 좀 적게 드는
작품이 많죠.


베를린비엔날레, 휘트니비엔날레, 요코하마가 열리는 오케이죤을 활용해서 그때 온 기자들, 미술인들을 모아놓고 프레스컨퍼런스를 연거에요.



(사진: 권현정)



2006/08/06 01:34 2006/08/06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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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생께서 늘 외치는 “아트 인 라이프”에 대해서 100자 이내로 설명해주세요.

- 아트는 생활의 미래이다! 거꾸로 생활은 아트의 미래이다!

 
9. ‘류병학표’ 전시 스타일이 있다면? 가령 거의 무리수에 가까운 많은 작품을 떼로 모아 놓는 것?

- 남들이 엄두를 내지 않는 것!


15.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러웠던 부산미술제였습니다. 진행과정 중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요? 역시 지역과의 갈등이었나요?

- 시끄러운 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시끄럽지 않으면 그만큼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17. 평소 비엔날레를 다루는 일간지, 특히 미술전문지의 보도 형태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 호기자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동안 일간지와 미술전문지에 관해 너무 많이 말을 했습니다.


18. 개인적인 질문 하나. 평소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로망이 있나요? 필명으로 ‘본기자’ ‘유기자’ ‘수습기자’를 써서 하는 말입니다.

- 그것은 글의 내용 혹은 형식 혹은 문체 때문에 작명된 것이죠.



(사진: 권현정)


19. 독일에 있을 때 한국에 있던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전시와 사건을 참견해오셨습니다. 비엔날레 일로 한국에 장기 체류하면서 마찬가지로 많은 곳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나요?
- 이번 비엔날레를 준비하면서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들을 누비면서 다니고 있는 중이죠.

21. 비장의 카드

- 비장의 카드를 어케 지금 내밀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2006/08/06 01:11 2006/08/06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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