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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천국 뉴욕? 99%의 지옥!
14시간의 비행 끝에 마침내 뉴욕 JFK공항에 도착했다. 로비 천정에 거대한 알렉산더 칼더 모빌이 걸려 있는 이 공항은 원래 1948년 개항 당시에는 뉴욕국제공항이라고 명명되었으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한 1963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맨해튼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차창 밖으로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서 본 듯한 대형 공동묘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잠시 후 휴대폰을 켜보니, 비행 동안 확인하지 못한 트위터의 타임라인은 바로 전날인 1월 18일자 《빌리지 보이스》지에 실린 데미언 허스트의 부고 기사로 떠들썩했다. <Damien Hirst (1965~ 2012): In Memoriam>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이 기사에서는 허스트가 1월 12일 뉴욕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알리며, 적지 않은 분량으로 그의 업적을 서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온라인 상에서는 사망의 진위 여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올라왔다. 무라카미 다카시 역시 이 기사에 “가고시안갤러리에서의 지나친 상업적 전시에 대한 페이크 기사일 것”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기실 가고시안갤러리에서는 세계 11개 지점에서 1월 12일부터 일제히 데미언 허스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터다. 물론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특종 욕심에 내심 정말로 그가 죽었기를 바라며 첼시에 있는 가고시안갤러리를 가 보았다. 역시 너무나도 평온하게 전시가 열리고 있었고, 사망 기사는 가짜로 판명났다. 구겐하임미술관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회고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All>이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에서 카텔란은 지난 28년 동안 제작했던 작품 128점 모두를 미술관 중앙의 로툰다 홀에 줄로 매달아 놓았다. 마치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기 직전의 사후 세계를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도상을 떠올리게 했다. 이러한 충격적 디스플레이는 엄청난 시각적 스펙터클을 선사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 양식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는 동안, 마치 교수형에 처한 것처럼 걸려 있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게 된다. 그 중에는 관 속에 누워 있는 케네디 대통령도 있고, 바위에 맞아 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흰 천으로 덮인 시체, 박제된 각종 동물들(말, 당나귀, 비둘기 등)이 있으며, 심지어 작가 자신의 얼굴을 닮은 인형도 매달아 자살을 암시하는 듯 보였다. 카텔란은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올해로 51세 밖에 되지 않은 그의 은퇴설은 진짜일까? 그동안 온갖 거짓말과 사기성 짙은 작업들로 악명 높은 그가 아니던가. 전시가 끝나기 하루 전인 1월 21일에는 일종의 ‘은퇴식’으로 저녁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총 7시간에 걸쳐 마라톤 심포지엄 <The Last Word>가 진행됐다. 심포지엄 관련 인쇄물의 표지에는 카텔란이 ‘The End’라고 적힌 묘비를 팔에 끼고 걷는 사진이 실렸다. 카텔란이 작가로서 어떤 ‘마지막 말’을 남길지 궁금해 하던 관객들은 미술관 바깥까지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 심포지엄에는 예술의 ‘종말’을 이야기한 아서 단토부터, 작가 트레이시 에민, 이론가 브라이언 오도허티, 가수 코트니 러브 등 30명이 넘는 화려한 출연진이 등장했다. 말 많은 장례식 같았다. 그러나 정작 카텔란은 일을 핑계로 행사장에 오지 않았고, 이 전시를 담당한 큐레이터 낸시 스펙터의 입을 통해 카텔란의 거취가 알려졌다. 그는 곧 뉴욕에서 ‘가업(Family Business)’이라는 새 화랑을 운영할 것이고, 이 사업에는 과거 롱갤러리를 함께 했던 뉴뮤지엄의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도 참여한다는 소식이었다. 2012년 뉴욕, 그곳에서는 예술가의 죽음 혹은 예술가의 은퇴조차 한낱 ‘쇼’로 이용하는 해프닝들로 새해의 첫 포문을 열고 있었다. 한편 9.11테러가 일어났던 세계무역센터에서 몇 블럭 떨어지지 않은 주코티공원에서는 지난해 가을부터 월가 점령 시위(Occ upy Wall Street)가 시작되어 그 여파가 전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시위대가 피켓에 쓰는 핵심 단어는 ‘1%와 99%’이다. 온갖 경제적 혜택이 집중된 상위 1%를 탐욕과 부패의 집단으로 상정하고, 나머지 99%는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미술계도 마찬가지다. 《미술수첩》에 의하면 뉴욕과 런던에 살고 있는 예술가는 8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연간 작품매매가 10억 원 이상의 작가는 단 75명에 지나지 않는다. 0.1%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뉴욕 작가들 대부분은 생업을 따로 둔 채, 주말이나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작업하며, 제2의 데미언 허스트나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꿈꾼다. 그러나 1%의 성공한 예술가들은 세습 기업주나 갱단 두목과 다를 바 없이, 젊은 작가에게 자신의 명예와 부를 나눠 줄 아량 따위는 없다. 심지어 그들은 죽었고, 은퇴했지만 망령으로 떠돌며 99%의 예술가들을 괴롭힐 뿐이다. 그야말로 ‘예술 지옥’이다. -2012년 2월호 <프리즘>
Ho
2012/02/0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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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게임, 갤러리를 습격하다!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물론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가 게임 캐릭터를 작품화한 것처럼 게임의 비주얼 이미지가 발산하는 예술적 상상력은 대단하다. 또한 상호소통성과 가상성이라는 게임에 내재된 주요 속성을 감안하면 ‘게임=예술’이라는 등식은 더욱 확고해진다. 미디어아트 분야에서는 비디오게임이나 증강현실을 이용한 작품이 등장한 지 오래다. 게임은 확실히 예술이다. 그렇다면, 게임을 만드는 사람은 아티스트인가?
예술과 게임,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다 오는 1월 20일부터 313아트프로젝트에서 열리는 <Borderless>전의 참여 작가들은 온라인 게임 제작팀에서 아트디렉터,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 등을 맡고 있는 게임아트 전문가들이다. 그동안 컴퓨터그래픽 기술로만 작업해 온 이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붓과 조각도를 손에 들고, ‘우리는 아티스트다!’라는 선전포고를 한다. 전시 제목 <Borderless>는 예술과 게임의 경계는 물론, 가상과 현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영역을 넘나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Borderlss>전에 참여한 6명의 아티스트 이은석 이근우 이진훈 김호용 김범 한아름은 데브캣스튜디오(devCAT Studio)의 주요 멤버다. 개발자(Developer)와 고양이(Cat)의 영어 단어를 합성한 데브캣은 온라인 게임 산업에서 선두를 달리는 (주)넥슨에 소속된 개발 전문 스튜디오 중 하나다. 데브캣스튜디오는 2001년 처음 설립되어, ‘생활형 MMORPG(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마비노기>를 제작했다. 처음엔 데브캣팀으로 시작되었으나 2004년 데브캣스튜디오로 승격, 넥슨에서 독립성 강한 스튜디오 체제를 구축했다. 그 이후 이들은 2010년 대한민국게임대상에서 대상을 포함한 6개 부문을 석권한 <마비노기 영웅전>을 제작했으며, 최근에는 <마비노기2>를 비롯한 신규 프로젝트를 개발 중이다.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마비노기> 시리즈는 웨일스 음유시인의 노래를 통해 전해 내려 온 켈트 신화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물로서, 탄탄한 스토리에 화려하고 역동적인 3D 영상으로 게임 유저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데브캣스튜디오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이은석 실장은 KAIST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인재로서, 2002년 넥슨에 입사한 이래 <마비노기><마비노기 영웅전> 등에서 특유의 예술적 감성과 앞선 기술력을 접목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러한 활약을 통해 그는 차세대 온라인 게임 산업을 이끌 주요 개발자로 꼽히며,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다. 게임 개발로 승승장구하던 이들이 작가로 새로운 도전장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넥슨은 1994년 설립 이후, 세계 최초의 그래픽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를 선보인 이래,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태국 싱가포르 미국 캐나다 등 전세계 104개국에 <마비노기영웅전> <카트라이더>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 등 57종에 이르는 게임을 진출시켜, 현재 약 12억 명이 넘는 엄청난 회원수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사업 규모가 확대되어 제작 시스템이 분업화될수록, 점차 개인이 갖고 있는 개성을 반영할 수 있는 범위가 약화되었다.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부품처럼 반복적인 업무 속에서 한 곳에 매몰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 분야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며 전문가로 인정받은 이들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았던 또 다른 영역을 체험해 봄으로써, 예술적 감수성으로 충전하는 계기가 필요했다. 각자 표현해 보고 싶은 창작욕을 맘껏 표출해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들도 ‘게임’이라는 매체를 사용할 뿐, 결국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창작자이기에…. <Borderless>전에는 기존의 게임을 모티프 삼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 낸 작품 20여점이 전시된다. 가장 최신의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던 주특기를 살려 새로운 예술의 형식을 제시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 먼저 데브캣스튜디오에서 원화를 담당해 온 이근우는 이번 전시에 아크릴화와 함께 <마비노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픽셀로 색분할을 한 뒤, 컴퓨터에 랜선을 꼽는 부품을 이용해 퍼즐 맞추기 식으로 픽셀아트를 구현했다. 또한 비주얼파트에서 이펙트, 사운드, 멀티미디어를 주로 맡아 온 이진훈은 게임에 등장하는 유저들의 캠프파이어 모습을 미디어 인스톨레이션 작품으로 재해석했다. 이은석의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 <아바타 거울>은 관객의 몸동작을 인식해 곧바로 모니터 위에 디지털화된 아바타의 모습으로 재현한다. 자신의 모습이 디지털화된 것을 즉각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가상과 실제의 경계를 다시 한 번 환기하게 된다. 반면, 페인팅과 조각 등 순수미술의 방식에 도전한 작가들도 있다. 이번 전시 참여 작가 중에서 홍일점인 한아름은 평소 게임 포스터 작업을 많이 맡았다. 그동안 그녀가 제작해 온 포스터는 붓터치와 빛의 효과가 살아 있어 전통적 서양화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긴다. 그러나 느낌만 그럴 뿐 컴퓨터로 그린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한아름은 자신이 과거에 제작했던 포스터 그림을 대형 캔버스로 옮겨 극사실적인 유화를 그렸다. 미루어 보건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을 터. 컴퓨터 그래픽툴로 표현할 수 있는 극적인 비주얼은 아무리 유화를 많이 그려 본 사람이라도 표현해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그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거의 처음으로 유화를 다뤄 봤다고 한다. 그럼에도 굳이 유화를 고집한 이유를 물었더니 “게임하는 사람들조차 게임을 하위문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순수미술 매체를 통해 그러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고 답했다. 한아름과 함께 페인팅에 도전한 김범은 게임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아크릴화로 표현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인기 여배우의 이목구비와 닮아 있고, 핸드백과 하이힐 등 명품패션으로 치장하고 있다. 또한 평소 게임 캐릭터를 소형 피규어로 만드는 작업을 해 온 김호용은 게임에서 신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을 거대한 조각상으로 만들었다. 근엄하고 육중한 외형은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 유적에서 출토된 대리석 조각상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보다 파급력 강한 ‘예술’을 꿈꾸며 물론 이들이 단 한 번의 전시로 전업 작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걸고 독립된 작품을 제작해 그것을 관객에게 발표하는 행위는 분명 색다른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참여 작가 김범은 “모니터와 태블릿, 마우스만 사용하다보면, 기법은 물론 생각까지도 얽매어 있게 된다. 그림을 직접 그리면서 의식이 많이 깨어졌다. 작품의 발상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의 폭이 넓어졌고, 기존 작품의 변화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틈틈이 개인 작업을 더 해보고 싶다”며 이번 전시의 의의를 강조했다. 사실 이 전시는 지난해 초부터 장기간 준비해 온 것으로, 참여 작가들은 몇 달 전부터 사옥 부근에 작업실을 얻어 일과 작업을 병행해 왔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예술가’로 벅찬 일정을 소화하느라 그들의 얼굴은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눈빛만은 전시를 앞둔 여느 작가들처럼 설렘으로 가득 차 보였다. 넥슨에서는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향후 데브캣스튜디오 외에 다른 팀들의 예술 프로젝트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하위문화로 치부되는 게임에 대한 인식 저변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예술 접근 방식을 모색 중이다. 일찍이 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아는 그의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문화란 원초(原初)부터 유희되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은 유희에서 비롯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분야인 만큼 게임이 가진 파급력은 전시장에 걸린 작품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보다 예술적인 게임, 그리고 게임처럼 재밌는 예술. 미래의 예술은 분명 이 둘의 간극이 좁혀진 모습일 것이다. -2012년 1월호 <핫피플>
Ho
2012/02/0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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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게이트키퍼, 기업 미술상의 명암
최근 미술 관련 뉴스로 작가들의 수상 소식이 부쩍 많이 올라온다. 지난 10월에만 두산연강예술상, 양현미술상, 이인성미술상이 새로운 수상자를 냈다. 어떤 상이건, 작가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영예로운 일이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인정 받고, 또 그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기회가 아닌가. 거기에 상금이나 부상도 받게 되니 더욱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상을 ‘받는 쪽’이 있다면, 당연히 상을 ‘주는 쪽’이 있다. 요컨대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주체다. 미술상의 주체를 살펴보면 시대에 따라 하나의 ‘트렌드’가 감지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대표되는 관전(官展), 즉 국가에서 시행하는 공모전의 수상제도를 꼽을 수 있다. 1970년대에는 한국미술대상전을 시작으로 중앙미술대전과 동아미술제 등 민전(民展)이 생겨났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미술 관련 단체나 잡지사, 화랑 등이 새로운 상을 잇달아 제정했다. 한편 1987년 김세중조각상을 시작으로 작고작가의 유족이나 원로작가가 제정한 상이 급증했다. 김종영 문신 석주(윤영자) 월전(장우성) 이동훈 이중섭 하종현 등의 이름을 내건 상들이 여기에 속한다. 근자에는 기업에서 주는 미술상이 ‘대세’다. 다음작가상 송암미술상 송은미술대상 양현미술상 에르메스코리아미술상 연강예술상 일우사진상 일현트래블그랜트 파라다이스예술상 등은 모두 2000년 이후 기업에서 제정한 상이다. 이 상들은 모두 예술 분야의 지원을 목표로 출발했지만, 점차 그 수가 늘어나면서 각기 상의 성격과 목표를 달리해 차별적인 운영 전략을 짜고 있다. 미디어아트나 사진 등 특정 장르로 특화하기도 하고, 해외 작가로 수상 대상을 확대하기도 한다. 또한 수상 작가의 연령을 달리해 신진 작가에게는 개인전을 지원해 주고, 중진 작가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주곤 한다. 상금은 대개 천만원대 이상으로 최고 1억 원에 달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해외여행이나 국제 레지던시 같은 부상을 제공하는 곳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생성되었다. 그러나 기업 미술상의 위상과 인기가 올라갈수록 그에 따른 문제점도 고개를 들고 있다. 첫째, ‘배타성’의 문제다. 대부분의 기업 미술상은 추천제를 통해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주최측이 상의 성격이나 수상작가의 퀄리티, 공정성 등을 유지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다양한 검증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너무나 폐쇄적으로 가동되어 외부에는 마치 ‘그들만의 리그’ 처럼 비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수상 대상을 해외로 넓혀 시행하는 경우, 국내 작가에게는 상대적 소외감만 안길 뿐 국제적 효과를 얻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둘째, ‘연속성’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과거 기업의 메세나 활동은 미술관을 짓고 작품을 소장하는 등, 지속적 지원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요즘은 1년에 단 한 번, 번듯한 시상식을 여는 것으로 압축시키면서 고효율의 아트 마케팅을 노린다. 수상 제도가 자칫 기업의 ‘보여주기’ ‘생색내기’의 방편으로 전락하기 쉬운 대목이다. 심지어 영국의 터너프라이즈나 미국의 휴고보스 같은 상을 들먹이며 “제2의 백남준을 만들겠다”고 거창하게 떠들었지만, 첫 수상자만 내고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셋째, ‘정치성’의 문제다. 기업 미술상은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으로 영입된 미술계 인사들이 이해관계에 얽혀 완력 다툼을 벌이는 또 다른 ‘미술 정치’의 현장이 되곤 한다. 더불어 ‘상’이라는 형식이 태생적으로 갖는 역학 관계에 따라 순수한 창작 활동이 서바이벌 게임처럼 변질되거나, 불필요한 사행심까지 부추기기도 한다. 그 밖에도 들리는 후문에 따르면, 미술상이 화려한 겉보기와 달리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 사례가 있다. 공식적으로 내건 상금에 수상 기념전 경비는 물론, 심지어 재단의 연간 운영경비까지 포함시켜 실제로 작가가 수령하는 액수는 얼마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한 상금과 함께 부상으로 해외 레지던시를 보내 주지만, 항공료나 현지 체류비로 상금을 쓰고 나면 결과적으로 남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 이때는 일일 경비(Per Diem)가 추가적으로 지급되어야 마땅하다. 문화예술 지원에 좋은 뜻을 가진 기업이 어떤 형태로든 미술상을 운영하는 것은 두 팔 벌려 환영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장기적 계획과 구체적 미션이 없는 상은 오히려 작가들의 창작 활동에 혼란을 주고 우리 미술계를 황폐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미술의 생태계를 피라미드 형태로 그려 본다면, ‘상’은 가장 상위에 위치할 것이다. 기업의 미술상은 막강한 자본력으로 단번에 미술계 최고의 ‘게이트키퍼(Gate Keeper)’의 자리를 차지한다. 기업이 동시대 예술의 가치를 평가하고 인준하는 ‘상’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은 이미 확고한 미술 제도의 울타리에 들어섰음을 증명한다. 그 막중한 책임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 미술상의 공익성과 효용성을 신중히 자문해 봐야 할 시점이다. -2011년 11월호 <프리즘>
Ho
2012/02/0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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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표 간장공장, ‘매머드 벽화’로 다시 태어나다!
‘동방의 요괴들’이 출범한 지 3년째다. 미술저널의 사회교육적 사명 의식으로 신진작가의 발굴과 더불어 ‘육성’에 초점을 맞춘 ‘동방의 요괴들’, 이 프로그램의 공익성과 잠재력에 뜻을 모으는 기관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시장이나 레지던스 등의 공간 후원부터 아트페어나 국제전 특별전 초청까지, 그 종류와 형태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작년 하이서울페스티벌의 부대행사로 개최됐던 <하이서울아트페어>는 ‘동방의 요괴들’과 서울문화재단 소속 서울시창작공간이 힘을 합쳐 진행한 ‘공동 주최’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사례였다. 이번에 샘표식품과 함께 완성한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는 미술과 기업 메세나의 ‘건강한 만남’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가 더해졌다. 최근 아트 메세나에 관심을 갖는 기업이 부쩍 늘고 있지만, 대개 사옥에 조형물을 세우거나 혹은 창작 활동에 일정 부분의 예산을 지원해 주는 등 일차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는 예술과 기업이 긴밀한 파트너십을 이뤄, 보다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예술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크다.
샘표식품, 신진작가에 꾸준한 관심 샘표식품은 지난 65년 간 간장과 된장 등 장류를 중심으로 한국 전통식품을 꾸준히 생산해 오고 있다. 특히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가 진행된 이천 간장공장은 샘표의 원천이자 발상지 같은 곳이다. 또한 이천공장은 단일 품목을 생산하는 설비 시설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23,150㎡)를 자랑할 뿐 아니라, 임직원은 물론 월 1,000여 명의 주부와 아이들이 찾아오는 ‘견학장’이다. 이천공장은 1987년 준공된 이후 벽면의 결로와 부식을 막기 위해 3~4년마다 페인트를 칠한다. 여느 공장과 다름없이 관리하기 편한 회색으로 칠해 오던 중, 어느 날 문득 샘표식품 박진선 사장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공장 도색 작업을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특화시키는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기왕이면 신진작가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샘표식품은 이번 프로젝트 이전에도 ‘젊은 미술’을 후원하는 데 관심이 높았다. 2004년 이천공장 내에 공장 직원들과 주민들을 위해 ‘샘표스페이스’를 개관, 지금까지 신진작가를 중심으로 전시를 열고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미술계에 ‘젊은 바람’을 일으켰던 1999년, 2000년의 <공장미술제>의 전시 장소 역시 샘표식품 창동공장이었다. <공장미술제>는 이영철, 유진상 등이 기획을 맡아 만 30세 미만의 신진작가를 200여 명을 소개하는 동시대미술의 ‘난장’이었다. 특히 화이트큐브가 아니라 투박한 공장에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개최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뉴밀레니엄의 미술 흐름에 새로운 물꼬를 열었다. 박진선 사장이 품고 있던 도색 작업의 예술 프로젝트는 ‘동방의 요괴들’을 만나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2010년 6월, 샘표식품과 art in culture의 관계자가 만나 첫 기획회의를 했다. 그 이후 여러 번의 미팅을 거쳐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윤곽이 나왔다. 초대형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만큼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는 장기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프로젝트 완성까지 소요 시간을 대략 1년으로 잡았다. 또한 단순히 작가를 지명해서 진행하는 방식보다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누적 인원 총 1,073명의 ‘젊은 작가 군단’으로 성장한 ‘동방의 요괴들’ 모두를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어 참여작가를 선정하기로 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공공성과 교육적 의미를 전면에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따라서 ‘결과’보다는 ‘과정’에 큰 의의를 두고자 했다. 벽화를 담당하는 작가뿐 아니라 프로젝트의 과정을 기록하는 사진, 영상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도 참여시키기로 했다. 작년 10월 16일, 이천공장에서 개최한 작가 설명회를 시작으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약 70여 명의 작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의 기본 개념과 공모전 지원 방법에 대해 안내했다. 또한 국내외 공공미술과 벽화를 연구해 온 이태호 경희대 교수의 특별 강연도 마련됐다. 공모전은 크게 벽화, 사진, 영상 영역으로 선택 지원할 수 있도록 했으며, 심사는 예심과 본심으로 11월부터 약 2달 간 나누어 진행됐다. 먼저 예심에서는 포트폴리오와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의 기본 컨셉트인 ‘전통의 현대화’를 주제로 작성한 지원서를 중심으로 심사했다. 권선 권순민 그리마 김남웅 김태윤 나광호 노경영 박미혜 신동근 이국현 이미희 이우리 임창욱 정영구 정지윤 정해민 조주연 최영 최유정 한석경 등 총 20명이 통과했다. 예심 통과자에게는 소정의 제작비를 지급,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를 위한 공모작을 새롭게 만들어 제출하도록 했다. 심사에는 샘표식품과 art in culture 관계자 외에 외부 심사위원으로 금천예술공장 김희영 총괄매니저를 초대했다. 또한 심사에 앞서 공모작을 이천공장에 전시, 직원들의 선호도를 반영했다.
‘샘표 아트 팩토리’가 탄생하기까지 올해 1월, 드디어 최종 참여작가 6인이 결정됐다. 벽화 부문에 그리마(2009동방의 요괴들) 나광호(2 010) 이우리(2009) 정지윤(2010), 사진에 정영구(2010), 영상에 김태윤(2010)이 바로 그 주인공. 참여작가들은 선정 소식을 듣고 기뻐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1박 2일 워크숍에 들어갔다. 다시 한 번 이천공장을 방문해 좀 더 꼼꼼하게 현장을 답사했다. 그리고 근처 리조트로 장소를 옮겨 새벽까지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다. 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주제를 정하려 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참여작가 6인 모두가 동의하고, 샘표식품 측에서 만족할 만한 주제를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참여작가들은 이천공장의 도면부터 샘표식품의 역사까지 면밀히 조사했으며, 다른 공공미술의 사례도 연구했다. 심지어 공장 직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수 십 번의 미팅과 회의가 온오프라인으로 진행되고 나서 ‘Dream Factory’라는 주제가 채택되었다. 작품 표현 방식에서는 공장 면적이 워낙 넓다 보니, 방문객의 견학 동선을 따라 건물 네 곳의 앞쪽 벽면을 중심으로 구상하기로 했다. 특히 공장 벽면에 규칙적으로 세로 방향의 요철이 나 있는 점에 착안, 전체를 하나의 병풍 형식으로 보고 <신 몽유도원도>를 제작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시안을 만들기 위해 각자 역할을 분담해 진행했다. 어느덧 3월, 샘표식품과 art in culture의 대표 및 임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작가들이 주제 및 시안을 프리젠테이션했다. 참여작가들은 3D로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고, 리허설도 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으나 현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요지는 애초에 샘표식품에서 제시한 기본 컨셉트인 ‘전통의 현대화’에서 아직 전통에만 머물고 있을 뿐, ‘현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존 시안에서 <몽유도원도>를 직접적으로 참조하는 데 갇혀 있었다면, 이번에는 ‘꿈’의 개념을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아우를 수 있도록 폭넓게 열어 두기로 했다. 과거 4명의 작가가 통합된 하나의 작업을 내는 방식과 달리 각각 한 건물씩 맡아 개별적으로 진행하면서 속도가 붙었다. 이윽고 다음 달에 다시 열린 프리젠테이션에서 최종 시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게다가 각 건물마다 작가 본래의 작품과 연결 짓는 디자인이 나와서, 참여작가 입장에서도 전보다 잘 된 일이었다. 확정된 도안을 바탕으로 공장 건물에 좀더 세밀하게 3D 모델링을 입히는 작업과 페인트 컬러 넘버링 등 마무리 과정을 거쳐 5월부터는 공장 도색이 시작됐다. 기본 바탕색을 칠하는 업체와 그림만 그려 주는 전문 업체를 달리 선정, 보다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작가 김태윤과 정영구가 각각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단순한 다큐멘테이션이 아니라, 그 자체가 또 다른 예술 작품으로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영구는 현장 사진 촬영 외에 흥미로운 작업을 제안했다. 프로젝트 초기에 리서치 차원에서 들춰보게 된 샘표식품의 사보 등 과거 시각자료들을 모아 아트북을 출간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정영구 역시 프리젠테이션을 거쳐 이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2 Time 2 Place》이라는 사진집이 출간됐다. 샘표식품의 65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면서도, 작가의 독특한 시선이 가미된 새로운 형태의 사진집이다.
간장공장이 곧 예술이다! 여름의 길목에 들어설 무렵, 마침내 벽화 도색 작업이 완성되었다. 그동안 박제처럼 온통 회색이었던 간장공장이 예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공장에 들어서면 가장 처음 관객을 맞이하는 포장동에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다. 건물을 맡은 작가 정지윤은 우리 전통 민화로 익숙한 <십장생도>에 착안, 나뭇가지 끝을 사슴 학 돌 물 등으로 연결시켰다. 이는 세밀화를 통해 전통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상징성을 그려왔던 작가의 개인 작품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샘표식품의 전통성과 역사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건강과 장수를 표현한 것이다. 동력동을 맡은 나광호는 샘표 직원과 견학 온 어린이들의 낙서를 이용해 사람들의 가장 ‘순수한 꿈’을 표현하고자 했다. 생산동 및 연구소를 맡은 이우리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등장하는 귀여운 동물을 통해 ‘환상적인 꿈’을 들려 준다. 샘표식품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기업으로 재미와 유머러스함을 간직한 기업이 되기를 희망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직원들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문에는 행운의 열쇠, 네잎클로버 등을 그려 넣음으로써 문을 통과할 때마다 행운이 올 것이라는 애정 어린 메시지도 담았다. 그리마는 곡물보관탱크부터 굴뚝과 문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표정의 아이콘과 생물체를 그려 넣어 상상력을 자극하고, 각각 독립된 공장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를 냈다. 참여작가 6인은 자신의 도안이 전문 도색 업체의 손을 빌려 실제로 공장에 그려진 모습을 보고 감동과 보람을 동시에 맛보았다. 작가 나광호는 완성된 벽화를 보면서 “젊은 예술가들의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꿈, 땀과 고민, 노력과 시간이 샘표 아트팩토리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대중성과 예술성 간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공공미술의 예술적인 질을 높이는 과정이라면, 이번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는 좋은 사례가 되어 줄 것이다”는 소감을 남겼다. 또한 작가 김태윤은 “다같이 한발 한발 조심히 나아갔던 과정 자체가 더욱 훌륭한 작업이었던 것 같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만큼이나 닫혔던 마음을 조금씩 허물어 가며 이뤄 낸 꿈…. 공장 벽면만 밝아진 것이 아니라 진행하는 작가들의 마음도 밝아진 듯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의 진짜 주인공은 공장 벽화의 ‘실사용자’라고 할 수 있는 샘표 임직원들이다. 그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벽화가 완성되자마자 직원들이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전송하는가 하면, 휴일에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서 구경시켜 주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견학 오는 방문객들 역시 버스를 내리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했다. 멀리서 보면 작품 속을 넘나드는 관객들도 작품의 일부이다. 공공미술이 진정으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기업과 예술의 즐거운 만남 샘표식품은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완성을 기념하며, 지난 8월 19일 이천공장에서 샘표식품 임직원과 퇴직자는 물론, 작가들의 지인, 미술관계자와 언론인 등을 초대해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젊은 작가들이 주축으로 된 프로젝트인 만큼 젊은 감성으로 꾸몄다. 기획전 <D-Factory>를 마련, 참여작가 6인의 개인 작업들을 소개했다. 축제 분위기를 돋우는 밴드 우쿨렐레피크닉과 유자살롱의 공연, 특수 제작된 간장 솜사탕과 팔레트에 직접 덜어 먹는 ‘맛 퍼포먼스’가 제공되어 관객들의 귀와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또한 행사가 끝나고 돌아갈 때에는 참여작가 6인의 작품을 특별 패키지로 만든 선물세트를 증정했다. 프로젝트 진행 기간 동안 수없이 부딪혔던 갈등과 걸림돌들이 한 순간에 사그라들 만큼, 참여작가와 주최측 모두 흡족한 행사로 마무리했다. 농경지와 공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천이 젊은 활기로 가득 찼다. 행사에 참석한 조병돈 이천시장은 “이천에 700여 개 공장이 있는데 다른 공장에도 이런 프로젝트가 퍼져나가 이천이 미술로 유명한 도시가 되면 참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야말로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는 이천의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했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의 눈부신 성과는 각종 일간지와 공중파 뉴스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는 ‘동방의 요괴들’ 입장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사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을 선보인 경험이 적은 신진작가들이 기업과 일반 대중을 상대로 작업해 보는 경험은 흔치 않다. 또한 팀을 이뤄 다른 작가들과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작업을 진행하는 협업 방식은 더더욱 소중한 경험이다. 1년 이상 장기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면서 참여작가뿐 아니라 샘표식품과 art in culture 임직원의 노고도 컸다. 두 회사 간의 긴밀한 협조와 협업으로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특히 샘표식품의 실무진이었던 이윤아 홍보과장은 과거 ‘쌈지’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로, 프로젝트 진행 내내 젊은 작가의 입장에 서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덕분에 ‘여러 사공이 이끌던 배’는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었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사람들은 더 이상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보다 행복한 삶, 즐거운 삶을 추구한다. 이제 사회는 물질적 가치의 소비에서 정신적 가치를 향유하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기업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사회다. 따라서 최근 기업의 경영 철학에도 문화예술이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역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문화 CEO’ 박진선 사장은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가 완성되자마자 “공장 외벽은 완성되었으니, 이제 공장 내부를 할 차례”라며 또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동방의 요괴들’ 역시 문화적 마인드를 가진 기업과 또 다른 형태의 즐거운 ‘만남’을 기다린다. 기업과 예술의 만나, 함께 꿈을 펼치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건강한 문화 강대국으로 가는 길은 시작된다. -2011년 9월호
Ho
2012/02/0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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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Flaneur)의 네덜란드 미술기행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따라 붙었던 ‘구보씨’라는 별칭이 무색할 정도로 요즘은 좀처럼 책상머리 앞을 떠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가끔 단비처럼 찾아 오는 해외 출장의 기회는 기자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보너스’ 같은 존재다. 물론 놀러 가는 것은 아니니 많은 제약이 따르긴 하지만, 작품 설치나 작가 섭외를 해야 하는 큐레이터나 작가들의 부담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벼운 편이다. 기자는 ‘취재’라는 특권으로 이곳저곳을 구경할 수 있고, ‘인터뷰’라는 명목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특히 작년 하반기부터 덴마크 캐나다 등의 출장 건이 몰려, 한동안 페이스북의 사진첩이 제법 ‘부티’ 나게 됐다. 그 중에서 이번 네덜란드 프레스 투어 초청 소식은 어느 때보다 기뻤다. 꼭 가보고 싶었지만 늘 기회가 닿지 않았던 곳 중 하나가 네덜란드다. 나에게 네덜란드는 오래 전부터 디자인과 미술의 ‘천국’이라는 인상이 잡혀 있었다. 급진적인 기획으로 명성을 떨친 미술관도 여럿 있고, 예술가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도 훌륭하다는 입소문을 익히 들어 왔기 때문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 같은 유럽의 ‘주류’ 국가는 아니지만, 동시대 미술계에서 네덜란드가 차지하는 영역은 그 영토보다 훨씬 넓어 보인다. 그렇게 네덜란드에 대한 기대감에 흠뻑 젖어 인천공항에 탑승 수속을 하러 카운터에 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내가 가져 간 E-티켓이 취소된 상태라 탑승권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현지 시간으로 새벽이었지만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프레스투어 진행을 도와주었던 드아펠(De Appel)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항공사 직원과 연결될 수 있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발권 과정에서 카드 승인 오류가 났다는 것. 이렇게 어이 없이 네덜란드행이 불발되는 것인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탑승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그때 인천공항 지하의 여행사로 달려가 딱 한 장 남은 항공권을 구입해 가까스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로부터 12시간 쯤 지나 암스테르담 기차역에서 그 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프레스투어에 대한 자료와 리플렛 등을 건네 주고는 “좋은 여행 되길 바란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대개 기자 초청 건은 비엔날레나 아트페어, 혹은 한국 교류전처럼 특정 행사의 취재를 요청받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우선 나를 초대한 주체는 한 곳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주요 미술기관인 드아펠 반아베미술관(Van Abbe Museum) 비트드비트(Witte de Wit) BAK(Basis Actuele Kunst) 이렇게 네 군데였다. 다시 말해 네덜란드의 아트씬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펴보라는 취지의 ‘프레스 투어’였다. 5일 동안 나를 초청해 준 네 기관만 필수적으로 들르면 될 뿐, 스케줄도 내가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위의 기관들은 모두 다른 도시에 위치해 있어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초행길이었던 나는 걸핏하면 플랫폼을 잘못 찾아 기차를 놓치거나, 역에 내려서도 미술관까지 한참 길을 헤매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마치 대학 시절의 떠난 배낭여행을 다시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괴롭지만은 않았다. 고생한 만큼 더욱 열심히 전시를 보게 되고, 훨씬 적극적인 자세로 투어에 임하게 됐다.
네덜란드 아트씬, 한국과의 인연 깊어 여러 도시를 돌아다녀야 했지만, 나라가 작은 만큼 대개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곳이어서 여행 내내 암스테르담에서 묵기로 했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이미 오후 4시가 넘었기 때문에 첫 날은 호텔 근처에서 라익스아카데미에 입주해 있는 작가 진시우와 오경민을 만났다. 라익스아카데미는 2년이라는 긴 입주 기간과 운영 시설 및 규모, 네트워크 등의 측면에서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 중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또한 라익스아카데미에는 작업실만 내어 주고, 주거 공간은 시내에 작가마다 따로 얻어 주는 것이 특징이다. 일찍이 이주요 김성환이 다녀온 이후 함양아 송상희 임고은 손광주 등의 한국 작가들이 이 기관에서 머문 바 있으며, 그 중에서 함양아와 송상희는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네덜란드에서 거주하면서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도 네덜란드에서 전시를 열었거나 장기 체류하는 한국 작가들이 꽤 된다. 영어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도 드물지 않다. 네덜란드와 한국과의 교류는 2003년 하멜 표류 350주년을 기해, 과천국립현대미술관의 주최로 열린 <FACING:KOREA>전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포암, 드아펠, 네덜란드 미디어아트 인스티튜트, 캔버스에서 대규모로 개최됐던 이 전시에는 현지의 헹크 슬라거, 마크 크레머, 마틴 키엘스트라 등과 한국의 백지숙, 윤재갑 등이 기획에 참여해 권오상 김상길 박찬경 정연두 등 당시 2~30대였던 한국 신진 작가 20여명을 소개한 바 있다. 이 전시에서 큰 역할을 했던 헹크 슬라거는 그 이후 한국 작가, 한국 큐레이터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2007년 리움에서 <플래시 큐브>전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번 출장에서 그를 따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암스테르담 기차역에서 헹크 슬라거와 마주쳤으니 네덜란드가 참 좁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정말 한국과 그의 인연이 깊다고 봐야 하나.) 이튿날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프레스 투어’에 나섰다. 제일 먼저 암스테르담 시내에 있는 드아펠에 갔다. 도착하니 디렉터 앤 데메스터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현재 전시장 및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건물은 원래의 공간을 리노베이션을 하는 동안 임시로 사용하는 중이어서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드아펠은 1975년 개관한 아트센터로, 소장품은 일체 두지 않고 1970년대의 진보적 예술 운동을 주축으로 삼아 퍼포먼스와 아카이브 중심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내세운 공간이다. 그 이후 드아펠이 국제 미술계에서 존재감을 확고히 한 것은 ‘보스당’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국제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스키아 보스가 디렉터로 부임한 1994년부터다. 특히 2006년부터 전세계의 차세대 큐레이터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전시 기획에 있어 리서치 워크숍 튜터링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한국인으로는 이 프로그램에 최빛나와 양지윤이 참여한 적이 있다. 또한 최근에는 미술시장 기반이 약한 네덜란드 미술계를 위해 상업화랑 관계자와 컬렉터를 교육하는 프로그램도 신설했다. 드아펠을 나와서 근처에 있는 네덜란드의 국립미술관 격인 스테델릭미술관 반고흐미술관 등을 들르고 나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다음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기차 여행이 시작됐다. 다행히 동행이 생겼다. 베를린에서 잠시 건너 온 작가 남화연과 함께 비트드비트가 있는 로테르담으로 향했다. 비트드비트는 작년 미디어시티서울의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했던 니콜라스 샤프하우젠이 관장을 맡고 있고, 몇 년 전 작가 김성환의 개인전이 열리기도 했던 터라 낯설지 않았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Making is Thinking>전이 열리고 있었다. ‘만들기는 생각이다’라는 선언적 전시 제목 아래 지성과 실천, 개념과 형식의 이분법을 와해하는 작업들을 소개했다. 윌리엄 오브라이언과 코키 타나카 등의 다국적 참여 작가는 ‘직관적 지식’을 강조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태도를 잃지 않는 작품을 선보였다. 관객 중심의 미술관으로 로테르담에 있는 대형 미술관인 보이만뮤지엄에도 들렸는데, 그곳은 퍼블릭 프로그램을 강화시키려는 인상이 강했다. 방문했을 당시 생물학 지질학 화학 등을 테마로 한 기획전 <Beauty in Science>가 열리고 있었는데, 미술이 아닌 과학을 소재로 삼아 미술관의 관객층을 다양화하고 나아가 미술의 기능을 ‘시각’에 관한 모든 것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사실 이러한 특성은 네덜란드에서 방문했던 대다수의 기관에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데에는 우선 미술 분야를 단지 엘리트 계층만 향유하는 것이 아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좀더 실질적인 이유로는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할 때 가장 중요한 심사 기준으로 삼는 것이 공공성이라는 데 기인할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15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하렘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한 정신병리학 전문 박물관 ‘허트 돌하우스(Het Dolhuys)’의 설립 배경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05년에 개관해 연간 3만 여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돌하우스는 ‘정신병’이라는 자칫 꺼리기 쉬운 주제를 흥미로운 전시 디스플레이 방식으로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보여 준다. 특히 과거 격리실로 쓰였던 공간을 그대로 보존해, 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혼자 지내게 하는 치료법을 관람객이 직접 체험해 보면서 환자들이 겪었을 공포심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밖에도 전시 구성 전체가 정신병에 대한 선입견을 거두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도록 유도하는 박물관 측의 치밀한 기획력에 감탄했다. 한국에는 히딩크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도시 아인트호벤에 있는 반아베미술관에서도 관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전시를 열고 있었다. <PLAY>전은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역할극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본격적으로 전시 관람에 앞서 관객에게 네 가지 역할 중 선택하도록 하고 각기 다른 방법으로 보게 한다. 여기서 네 가지 역할은 정신성을 중요시하는 ‘순례자(Pilgrim)’, 일상으로부터의 휴식과 특별한 경험을 좇는 ‘관광객(Tourist)’, 뚜렷한 목적 없이 어디에 소속되지 않고 우연을 따르는 ‘산책자(Flaneur)’, 도전과 몰입 그리고 행동과 생산을 하는 ‘노동자(Workers)’로 나뉜다. 관객은 전시장 입구에서 해당 역할의 이니셜인 P, T, F가 쓰인 스티커 중 하나를 선택해 가슴에 붙이고 전시를 봐야 한다.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구보씨를 연상시키는 ‘F’를 집었다. 각 역할을 맡은 관객들은 어떤 것이 좋은 예술인지, 혹은 나쁜 예술인지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보는 다양한 ‘눈’을 키우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술을 절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대로 미술관의 입장에서 보면 미술관의 공공성을 높이고, 관객을 미술관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재정의하려는 시도이다. 좀더 깊게 생각해 보면 예술품 자체, 혹은 작가(생산자)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미술사의 주도권이 이제는 관객(수요자)에게 넘어 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 공동 커미셔너로 우리에게 잘 알려졌고, 지금은 반아베미술관장을 맡고 있는 찰스 에셔가 이번 전시 기획에 직접 참여했다. 또한 관객들이 온라인으로 질문을 하면, 그에 대한 관장의 답변이 담긴 동영상을 미술관 지하의 시청각실은 물론 미술관 홈페이지에서도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현대미술 과목을 다루는 수험 동영상 강의 같이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관장의 모습은 참으로 낯설었다.
위기 맞은 네덜란드 문화예술 기관들 3일 동안 암스테르담 하렘 로테르담 아인트호벤을 축지법으로 다니듯 헐레벌떡 훑고 나서, 떠나기 전날의 마지막 여정으로는 유트레흐트를 택했다. 물론 초청해 준 기관 중 하나인 BAK을 꼭 가야 하기도 했지만, 우리 잡지의 필자이자 나의 친구이기도 한 최빛나가 디렉터로 있는 CASCO에 가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심지어 BAK이라는 기관 역시 최빛나가 그곳에서 재직하면서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녀가 일하는 동안 한국 작가 양혜규의 개인전이 열려 art에 기사를 낸 적도 했다. BAK의 디렉터인 마리아 흘라바요바는 동구권 출신으로 비주류권 출신의 작가와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종종 소개한다고 들은 바 있는데, 내가 갔을 당시에도 BAK에서는 러시아 작가 올가 체르니세바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편 CASCO는 한국으로 치면 대안공간의 성격과 규모를 지닌 곳이다. 순수미술과 디자인, 그리고 이론까지 한데 아우르는 성격으로, 크기는 작지만 사무 공간이자 전시장, 혹은 공연장으로도 사용된다. 여러 외국인(?) 스태프를 통솔하며 한 공간의 살림살이를 다부지게 꾸려나가는 최빛나와 2년 전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남화연까지 합세해 네덜란드에서의 마지막 밤, 뜨거운 해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반갑지 않은 소식들이 속속 들려 왔다. 작년에 집권당이 바뀌면서 문화예술정책이 전면적으로 개편, 2013년부터는 40% 이상의 예산을 삭감하기로 하면서 그에 따른 구체적 변화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네덜란드 대부분의 미술관은 운영 예산의 많은 부분을 정부 및 지역의 지원을 받고 있어 그 타격이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얼마 전에는 라익스아카데미의 입주작가들이 존폐 여부에 관련한 반대 시위를 했다고 한다. 지난 몇 년간 네덜란드에서 거주하다가 최근 한국으로 돌아온 한 작가는 “이제 네덜란드에 호시절은 갔다”며 위기에 놓인 네덜란드의 아트씬의 상황을 전했다. 역시 천국이란 ‘무지개 너머’에나 있는 것일까. -art in culture 2011년 8월호
Ho
2011/08/16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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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KTRA 12
몬트리올은 서울에서 상당히 멀었다. 직항이 없어 도쿄에서 한 번, 밴쿠버에서 한 번 더 갈아타야 했다. 출발한 지 총 18시간이 걸려 몬트리올 현지 시간으로 저녁 7시에 도착했다. 무척 피곤했지만, 밤 9시에 시작하는 퍼포먼스에 꼭 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숙소에 짐만 풀고 바로 달려갔다. 처음 가본 도시의 낯섦과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에 대한 호기심이 교차하는 가운데, 어느덧 퍼포먼스가 열리는 UsineC 공연장에 당도했다. 첫 공연은 미국 작가 커트 헨트슐라거의 <피드(FEED)>. 공연장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관람객은 주최 측에서 나누어 준 서류에 필히 서명을 해야 했다. 그것은 퍼포먼스를 보다가 중간에 발작이라든가 건강상의 어떤 이상 증상이 생겨도 주최측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데에 대한 ‘동의서’ 비슷한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공연이길래, 하며 겁을 잔뜩 먹고 공연장 안으로 갔다. 공연 전반부에는 ‘미디어아트’라는 말을 들으면 떠올릴 만한 그래픽 이미지와 저음의 사운드가 흘렀다. “뭐야, 이 정도 갖고…”라는 생각이 들 무렵, 잠시 암전이 흐르더니 공연장 바닥에 연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연기는 점점 더 차올라 어느새 공연장 전체를 에워쌌다. 심지어 바로 옆에 앉은 사람조차 전혀 감지되지 않을 만큼, 연기로 완전히 가득 찼다. 누군가는 가스실에 들어온 것 같다며 속삭였다. 장시간 비행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마치 구름 속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듯한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고 나서는 혼자 연기 속에 갇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어지럽기도 했다. 정말 이러다간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 중간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모르는 척, 툭 치며 타인의 존재를 확인해 가면서 겨우 버텼다. 그렇게 30분쯤 시간이 흐르니, 어느새 공포심과 불안감은 사라지고 마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간 듯한 평온함을 느꼈다.
미디어아트가 발전한 배경 그렇게 몬트리올에서의 여행은 꿈꾸듯 시작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도, 길마다 붙여진 이름도 모두 프랑스어였다. 북미가 아닌 유럽,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파리에 온 것 같았다. (심지어 몬트리올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노트르담대성당이다!) 몬트리올을 포함한 퀘벡주는 캐나다에서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도시로, 캐나다의 주요 지방 정부 중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높은 곳으로 꼽힌다. 특히 캐나다는 스마트폰 블랙베리를 생산해 낼 정도로 IT 사업이 발달돼 있다. 지정학적으로는 아메리카 대륙, 즉 미국과 가까이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유럽과 훨씬 더 유대감이 강한 몬트리올. 이곳에서 유독 미디어아트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회화와 조각 등 미국 중심으로 전개된 전통적 미술 장르와 차별화하려는 그들의 ‘전략적 선택’도 깔려 있다고 본다. 실제로 기자가 방문한 시기에는 몬트리올비엔날레도 열리고 있었는데, 오래된 대학 건물에서 열린 전시는 <일렉트라>의 열기에 훨씬 미치지 못했고 출품작 수준도 낮았다. 기타 상업 화랑이나 미술관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나마 좋았던 전시는 사설 재단에서 만든 DHC미술관의 씨엘 플로이에의 개인전 정도였다. 그에 비해 미디어아트에 대한 관객층은 폭도 넓을 뿐더러,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일렉트라>에서 선보인 오디오+비디오 퍼포먼스의 음악은 클럽에서 들려 주는 신나는 테크노 댄스 음악이 아니라, ‘21세기 존 케이지’를 떠올리게 할 만한 단조로운 전자음이 대부분이었는데 완전히 심취해 있거나 심지어 비트에 맞춰 춤을 추는 관객도 있었다. <일렉트라>와 함께 열리는 또 다른 대형 사운드아트 페스티벌인 <뮤텍> 외에 몬트리올 내에는 크고 작은 미디어아트 관련 이벤트들이 줄지어 열린다. 대형 건물에 설치된 공공 조형물도 미디어아트로 된 사례가 많았다. 확실히 몬트리올은 ‘미디어아트’의 도시였다. 몬트리올 시민의 뜨거운 사랑 속에 올해로 12번째 행사를 치른 <일렉트라>는 페스티벌이 열리는 5일 동안 저녁 시간대에는 UsineC에서 퍼포먼스 중심의 미디어아트를 소개하고, 낮 시간대에는 퀘벡수아즈시네마테크에서 IMDA 컨퍼런스를 열고, 그밖에 시내 갤러리에서 오브제 중심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페스티벌 프로그램에 따라 관객들은 주요 행사장인 UsineC와 퀘벡수아즈시네마테크를 밤낮으로 오가느라 바빴다. 행사 스케줄이 없는 오전 시간대에는 미디어아트 관련 기관을 견학했는데 대표적인 곳을 꼽자면 헥사그램이 있다. 헥사그램은 몬트리올의 주요 대학인 UQAM과 콩코르디아 등에 정부 지원으로 설립된 일종의 R&D연구소라고 볼 수 있다. 대학 부설기관인 만큼 상업적인 목적보다는 미디어 관련 연구자들을 인큐베이팅하는 성격이 크다. 이틀 동안 스무 곳이 넘는 랩실을 방문했는데, 각 랩실은 대부분 작가 중심으로 연구원이 구성되어 있고 작업에 필요한 최첨단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가운데 미디어아트를 육성하는 헥사그램은 3D, 사운드, 인터랙티브 로보틱, 키네틱 등 다양한 분야를 골고루 다루는 가운데, 특히 뉴미디어를 패션디자인 혹은 현대무용 등과 결합하는 학제 간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가령 패션디자인에 미디어 기술을 혼합시켜 직접 몸을 움직일 때 발생하는 자가 전력으로 인조 꽃이 피었다 지는 의복을 만들어 내거나, 현대무용 안무와 오디오 비디오를 결합해 공감각적인 퍼포먼스를 만들어 내는 식이다. 주제적 측면으로는 최첨단의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자연과 인간에 관련 짓는 데 관심이 높았다. 만났던 작가들마다 ‘휴먼 바디’와 ‘휴먼 라이프’에 주목하면서,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자가 만난 한 중국작가는 자신의 랩실에서 화초를 키우고 있었다. 대개 미디어테크놀로지 연구소에서는 전자파와 건조한 공기 때문에 식물이 자랄 수 없는 환경인데, 그는 역으로 식물을 위한 특수기계 장치를 만들어 식물을 키운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테크놀러지, 감각을 일깨우다 헥사그램의 다양한 랩실을 둘러보며, <일렉트라>에서 본 일련의 퍼포먼스들이 단지 겉만 번지르르한 ‘IT박람회’가 아니라, 장시간 동안 연구를 거친 창조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헥사그램에서 자주 목격했던 예술적 주제와 기술적 형식이 <일렉트라>의 프로그램에서도 그대로 연장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미디어아트의 가장 새로운 이슈는 화려한 테크놀로지 기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제된 기술로 획득하는 디지털 미학’ ‘기술을 통한 감각의 확장’ 등에 대한 고민이었다. UsineC의 위층에 마련된 전시장에서는 크리스 살터의 개인전 <Just Noticeable Difference>를 볼 수 있다. 사전 예약제로 진행되는 이 전시는 정해진 시간에 혼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밀폐된 공간에 누워 느껴질 듯 말 듯한 소량의 빛, 소리, 진동이 흘러나온다. 이미 충분히 미디어화되어 있는 도시 생활 속에서 오히려 최소한의 미디어 장치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섬세한 감각들을 일깨운다. 오디오+비디오 퍼포먼스로 진행된 프랑크 브레트슈나이더의 <EXP> 역시 마치 턴테이블 위의 미세한 파동이 먼지를 모았다 흩어지는 듯한 단순하고 추상적인 영상을 극도의 저음과 함께 선보였다. 퀘벡수아즈시네마테크에서 전시된 헤르만 콜겐의 영상 작품 <Dust Restriction>은 마르셀 뒤샹과 만 레이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먼지를 초고해상 카메라로 촬영해 선보였다. 아주 느리게 영상을 재생시킴으로써 물과 공기를 표류하는 작은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마치 무중력 공간을 표류하는 듯한 입자와 파동은 우리의 시각 인지 능력을 최극한으로 끌어 올린다. 또한 과거 조선소로 쓰였던 공간을 전시장으로 바꾼 달링파운드리에 설치된 코드 액트의 <Cycl oid-E>는 관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몇 개로 연결된 기다란 금속관이 지름 11m의 큰 원을 그리며 공간을 탐색하듯 접혔다 펴졌다 움직인다. 금속관이 중력에 의해 움직일 때 생성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음원이 되어 실시간으로 음악이 생성된다. 형제 작가인 코드 액트는 이 작품으로 아르스일렉트로니카에서 상을 받았다. 이 작품의 진정한 예술성은 미니멀한 외관에도 있지만 거대한 금속관을 움직이는 동력을 가장 중심에 위치한 단 한 대의 모터로만 이끌어 내는 ‘최소한’의 기계 장치에 있다.
미디어아트, 과거와 미래를 투영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미디어아트’에 전형적으로 기대하는 미래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작품들도 있다. UsineC에서 퍼포먼스가 열릴 때 기다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애녹 위퍼레흐트와 제인 킹 글리, 마리어스 킨텔은 바이오메카닉 칵테일을 제공한다. 관객이 진실게임에 동참하면 사이보그처럼 완벽한 외모의 금발 미녀가 자신이 입고 있는 칵테일 제조 드레스에서 방금 만든 음료를 준다. 페스티벌 마지막 날 공연을 장식한 프랑스의 신진 작가 1024아키텍처 그룹의 <유포리>는 빛이 투사되는 재질의 스크린을 겹겹이 설치해 놓고 그 위에 테트리스 같은 기하학적 도형이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틀어 놓았다. 동시에 그들은 스크린 뒤에서 테크노 음악을 트는 DJ가 되기도 하고 기타 연주자와 가수가 되었다가, 영화 <스타워즈>에 나올 법한 전자빔을 휘두르는 파이터가 되기도 한다. 한편 루이스 필립 데머스의 <The Tiller Girls>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로봇이 퍼포머로 등장한다. ‘H’ 구조의 금속제로 만들어진 로봇 수십대가 음악에 반응하며 군무를 춘다. 1900년대 유행했던 댄스 그룹 ‘틸러 걸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으로, 원격조종에 의해 삐걱이고 서로 걸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난다. 또한 마틴 메시에르의 <Sewing Mach ine Orchestra>는 재봉틀을 이용해 전자 음악을 만들어 낸다. 관객은 소리를 듣고 볼 수 있으며, 작가는 마치 재봉틀이 턴테이블인 양 이곳저곳을 다니며 ‘박아 댄다’. 또한 스티브 다니엘의 키네틱아트 작품인 <Sess -ile>은 관객이 손을 가져다 대면 곤충 다리를 연상시키는 작은 구조물이 움직다. 일종의 초기 미디어아트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은 최첨단 미디어아트 환경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 부대 전시로 오보로갤러리에서 열린 브래드 토드의 <La Foret Bleue> 역시 마찬가지다. 구형 발열기와 오래된 라디오를 송수신기 삼아 영상 작업을 보여 주거나, 초기 안테나를 이용한 설치 작업 등에서 비슷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작가는 해가 지고 나면, 갤러리 외벽을 스크린 삼아 숲의 정경을 그래픽화한 영상물을 상영했다.
미디어는 마사지다! <일렉트라>의 부대행사로 열린 컨퍼런스 프로그램 IMDA(International Marketplace for Digital Arts)에서는 미디어아티스트는 물론, 미디어아트 전시를 전문으로 기획하는 큐레이터와 저널리스트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미디어아트는 단지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랜 시간동안 경험해 온 디지털 시대 또는 디지털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디어아트는 매일매일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IMDA에 참여한 패널들은 오늘날의 미디어아트는 전통적 예술의 과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이슈 아래 점점 가속화되는 미디어아트의 새로운 지형을 탐색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특히 미디어아트 분야를 이끌고 가는 실무진의 네트워크도 강조했다. 그래서 올해 컨퍼런스에는 한국의 최두은, 일본의 수미토모 후미히코와 유키코 시카타, 중국의 짱가 등 아시아 지역의 미디어아트 전문가를 대거 초청함으로써 아시아 미디어아트씬을 상호 점검했다. 사실 <일렉트라>의 가장 큰 목적은 국제적인 미디어아트 전문가들이 함께 만나 작품과 함께 투어를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 일환으로 <일렉트라>는 이미 작년 송도에서 개최된 INDAF의 파트너로 참여해, 헤르만 콜겐, 장 뒤부아 등 캐나다 출신의 미디어아티스트를 소개한 바 있다. 컨퍼런스에 발제자로 나온 아트센터나비 최두은 큐레이터의 말처럼, 오늘날의 관객들은 예술 작품을 더 이상 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공동의 창작자가 되고자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디어아티스트와 미디어아트 전문가들은 보다 열린 ‘소통’의 창구로서 미디어를 재정의하고자 한다. 그런가하면 일각에서는 미디어가 일상적으로 완전히 침투한 오늘의 상황과 더불어 미디어를 더 이상 대중매체적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심리, 정신 상태, 윤리적 측면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오래 전 맥루한이 미디어는 ‘마사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미디어아트는 오감 중에서 가장 촉각적인 매체이고, 나아가 ‘제6의 감각’을 끌어 낼지도 모르겠다. 기자가 몬트리올에 도착하자마자 봤던 <피드>의 연기 속에서 경험했듯이 말이다.
-art in culture 2011년 6월호
Ho
2011/07/22 10:57
2011/07/2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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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생존법
지난 2월, 젊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 이후 예술인의 생존 문제를 둘러싼 여론이 뜨겁다. 특히 그동안 문화예술계의 과제로 남아 있던 ‘예술인 복지법’이 수면 위로 올라와 정부에서는 예술인의 4대 보험 적용을 골자로 곧 법안을 통과시킬 예정이다. 또한 문화예술계 내부에서도 오늘날 예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교육과 정책 등을 둘러싸고 분분한 의견이 오가고 있다. 물론 예술가의 생활고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성세대는 “우리 때는 더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국민소득지수가 높아졌을 뿐 아니라, 갈수록 심화되는 신자유주의 환경 속에서 젊은이들은 ‘상대적’ 빈곤함과 박탈감에 괴로워하고 있다. ‘오늘, 여기’ 젊은 예술가 10인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을 진정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어떤 대응 방식으로 살아남고자 하는지 직접 들어 보자.
지속 가능한 실패의 조건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 이수성·작가 예술이라는-아직도 발음하기 민망한-영역에서 ‘젊은 작가’라는 가변적인 무리는 상황에 따라 부추겨지며 유행처럼 소비되기도 하고, 어떤 윤리를 강요받기도 하며, 때로는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한 해에 수 천 명의 잠재적인 실업자들이 자신의 작품 가격 따위나 상담해 주는 미대를 졸업한다. 그리고 작업을 이어나가는 많은 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스로 ‘젊은 작가’라는 이름 앞의 수사를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하게 되거나, 포기를 권유 받거나, 망설이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에는 각자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 중 분명한 한 가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대신 빼앗기고 마는 (예술에 대한 사회의 신화화 이면에 자리잡은 지독한 편견으로 인한) 어떤 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젊은 작가’에 대한 지원과 기회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기관, 단체 등에서 다양한 성격의 공모, 공간 지원과 같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그것이 ‘젊은 작가’의 생계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책임지지는 못한다. 생계는 철저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한 사회의 작동 방식은 무한경쟁, 서바이벌, 빈부격차, 비정규직 등과 같은 문제들을 유발하며, 대부분의 우리에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처럼 느껴진다. 오늘날의 예술이 시공간을 공유하는 감각을 전제하고 우리들이 그것들의 불합리성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과 그것들이 전제된 새로운 실험들은 언제나 이 사회가 제공한 실패의 조건들 사이에서 불안하게 서 있을 것이다. 에스컬레이터를 반대로 탔을 때의 헐떡거림, 올라가기를 멈추었을 때 낙오한다는 시대적 불안감 그리고 동시에 찾아오는 생계에의 부담은 우리를 중심으로부터 서서히 밀어낸다. 이미 삶이란 단어는 생존으로 대체되었고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과연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 ‘젊은 작가’의 독립적인 생존이 가능할까? 먹고 살기 위한 다른 종류의 노동 없이 창작 노동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지원신청서의 네모 칸에 자신을 구겨 넣지 않아도, 가시적 성과물 없이도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는 없을까?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바로 잡을 수 있기는 한 것일까? 나는 오늘의 실패가 언젠가 다가올 성공을 담보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접어둔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는 이제 실패를 위한 실패를 하겠다. 점점 더 실패하겠다. 나의 계속되는 실패가 실패의 조건들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그러한 드러냄이 우리의 생존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날까지만이라도.
Y2K 밀레니엄 버그, 그리고 지금의 나 > 최원준·작가 1999년 나는 밀레니엄을 맞이하던 그해부터 전시장을 기웃거렸다. 당시는 미술 작가라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생존하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멀리서 지켜본 미술계는 한마디로 수수께끼였다. 가장 이해 안 되던 것 중에 하나는 당시 열리던 전시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정치적인’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토록 수수께끼 같았던 미술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어떤 ‘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정치적인’이라는 표현과 결부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생존법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이미 타락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타락은 성공과 동일시되는 자본에 대한 욕망 때문이지만 우매한 내가 몰랐던 것은 제 아무리 생존력이 높은 작가라 할지라도 그것이 작가의 경제력 상승과는 크게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타락해 가는 자신을 작품 속에 감추는 테크닉을 배워 나간다. 현실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담론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현실은 응시하되 동시에 거울은 바라보지 말 것. 이것이 나의 생존법이다.
재밌게만 살기 참 힘들어! > 안데스·데일리코더 산울림 김창완 아저씨의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연기와 음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에 그의 대답이 ‘연기는 돈 안주면 안 한다’였다. 나에게는 디자인이 그렇다. 돈 안주면 디자인은 안한다. 그런데 요즘 돈을 준다 해도 디자인일이 하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나는 잠수 중이다. 한 회사와 일을 하다가 중간에 잠수를 탔다. 통장 잔고는 텅 비었는데도 도무지 일이 하기가 싫다. 그동안 밥벌이로 디자인을 하면서, 재미로 하는 일은 따로 두고 있었다. 한번도 재미로 하는 일로 돈을 벌어볼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재미로 하던 일로 어쩌다 돈을 벌면 그건 보너스 정도로 생각할 뿐 그 돈은 생계를 위해 쓰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해서 재미있는 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우아하게 돈을 벌고 싶었다. 그렇지만 돈은 더러운 기운으로 내게 왔다. 세상의 부속품이 되어 하루 종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거나, 내 의지와 반대로 강요당하는 일을 하는 등 돈은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때 생겼다. 내가 재미있는 일, 잘 하는 일,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를 발견하게 하는 일이 나의 직업이 되는 것. 이건 환상일까? 기본적으로 돈을 버는 원리는 이렇다. 내가 남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제공해 주면 댓가로 돈을 받는다. 그렇다면 내가 재미로 하는 일은 남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의 감정을 움직여 준다. 보통은 ‘감동을 준다’라고 표현한다. 영화나 TV, 책, 음악이 하는 기능 즉,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의 기능과 같다. 그 기능은 같으나 정확히 그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다. 그것은 때에 따라 형태를 바꾼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형태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감정이기 때문에 물질적 형태는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감정을 파는 사람. ‘감정만을 팔아요. 집에 갈 때 가져 갈 것은 없어요. 잠시 당신의 감정을 조금 움직여 줄 뿐입니다.’ 그런데 도통 이 무형의 상품을 어디서 팔아야 할지 모르겠다. 팔 것은 있는데 시장이 없다. 이러다가는 판매자가 시장까지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인터넷시장이 공짜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통적인 시장도 기웃거려 보았지만 그 구조가 어딘가 나와 맞지 않다. 공연장은 기존의 형식화된 공연을 위한 맞춤형 공연장이 대부분이고, 갤러리는 감상자에게 돈을 받지 않는 시스템이다. 작품 판매라는 ‘물질 대 물질’의 거래가 있을 뿐이다. 재미로 시작한 일이 생계를 위한 벌이가 되면, 재미있지 않은 고민과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냥 하던 대로 재미있는 일은 재밌게 하고 돈은 더럽게 벌 것인가? 아니면 재미있는 일을 덜 재미있게 할 것인가? 일단은 후자로 가볼 생각이다. 재밌게만 살기 참 힘들다.
예술가의 노동을 사회적 비용으로 인정받기 > 정윤석·작가 “소위 ‘인디뮤지션’은 클럽에서 열심히 공연을 하여도 손에 들어오는 대가는 없다. 그리고 클럽은 자신들이 번 입장 수익금을 건물주에게 임대료로 바친다. 영세한 클럽의 경우엔 클럽주와 음악가들에게 돌아오는 수익이 거의 없다. 우리들은 허공에 기타로 좆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권용만·밤섬해적단 2009년 용산참사 이후 철거투쟁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마포구 동교동 ‘두리반’은 홍대앞이라는 지역적 특색과 함께 많은 활동가들과 예술가들이 연대를 하고 있다. 이러한 연대는 재개발 문제로 위기감을 느낀 영세 세입자뿐만이 아니라 홍대앞을 터전으로 삼는 ‘밤섬해적단’과 같은 인디뮤지션들의 고민과 자발적 참여로 가능해졌다. 이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술가의 처우 개선이 아닌 예술가의 노동을 사회적 비용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 자신의 아이디어로 기획을 진행하지만 생계를 걱정해야하고, 좋은 작가를 지지하려 글을 쓰지만 정작 원고료를 받을 수 없는 현실.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싶지만, 시장과 공간의 눈치를 봐야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현실에 대해 발언하길 주저하면서 몇몇 정치인이 던져준 생계법안에 자존감을 논한다면 모순된 태도가 아닐까. 오늘날 많은 기성세대가 지금의 젊은이들을 보고 무기력하다고 쉽게 말하지만 그러한 비판 속에서 나는 자신감을 얻는다. 이러한 변화는 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용기란 스스로 지켜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인간의 사고와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고 그것을 위해 지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라면 이제 예술가들도 잠시 자신의 도구를 내려놓고 자기의 삶과 그 방향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경계 안과 밖에서 함께 걷기 > 조은비·상상마당갤러리 큐레이터 내 능력의 부족이나 불운, 그 밖에 다른 모든 요소를 열거한다 해도 대표적인 학력과잉 시장인 미술계에 ‘대학 졸업장’만으로 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불행히도 그것은 여전한 사실이다. 선배 큐레이터로부터 ‘주제파악’하라는 말을 들으면서, 실업과 구직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없었다. 용케 들어간 갤러리에서 나의 일상은 전혀 ‘미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위축시켰던 것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력’이라는 분위기와 신뢰할 만한 동료적 관계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내가 추구하는 일에 대한 관념과 삶의 모습은 아직 막연했지만, 무조건 “참고 버티라”는 어른들의 조언으로는 주어진 역할에 만족할 수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행복하지 않았다. 도망치듯 대학원에 진학 한 뒤, 학비 마련을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4년 만에 가까스로 졸업을 했다. 그 시간 동안 일종의 ‘학문 공동체’를 지향하는 전공의 특수한 분위기 덕분에 긴 호흡을 갖고 현재와 미래를 고민할 수 있었고,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새 한국사회는 더욱 빠르게 신자유주의화되었고, 미술계 역시 미술시장의 활황과 국내외 작가 레지던시 입주 열풍 등으로 작가들의 삶은 점점 더 경쟁 속으로 내몰리며 개별적인 전략을 구축하거나, 혹은 무기력해져 있었다. 제도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 혹은 냉소를 포착하면서 나는 예술을 고귀한 무엇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예술에 과잉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큼 예술의 가치를 일부러 폄하하는 것도 어색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예술과 일상을 분리시키고 낭만화하려는 제도의 힘과 작가들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무언가 다른 유형의 예술과 예술가 그리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어떤 공간을 꿈꿨다. 2011년, 지금 나는 그때의 고민들을 숙제로 남겨둔 채, 비교적 안전한 방식으로 다시 제도 안에 들어와 있다. 생계라는 현실의 문제와 제도가 갖는 힘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동의로 기관에 취직을 하고, 한 선배의 말마따나 ‘한자리를 꿰차고’ 있지만, 나는 이것의 얄팍함에 대해서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이 미흡한 한국사회에서, 거기다 그 어느 업계보다 불안정한 고용 상황과 무급 인턴제가 공공연한 미술계에서, 지금 내가 차지한 ‘자리’는 과연 얼마나 안정적인 것일까. 더군다나 문화예술에 대한 가치부여와 사회적인 합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인간다운 삶에 대한 기본권조차 외면하는 한국사회에서 언제까지 내가 원하는 삶을 그리며 그 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까. 최근 몇 년 간 나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친구들의 집을 떠돌면서 수차례의 이동과 정착을 반복해 왔다. 서울에서 방 한 칸 얻을 보증금을 내 힘으로 마련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운 좋게도 보증금을 구한 친구들의 집에 월세를 보태는 형식으로 함께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혼자 고군분투해 온 생활을 접고, 7명의 친구들과 함께 동거를 하고 있다. 이 집단적인 거주는 ‘청년 실업’이라는 세대적인 불안과 대도시의 주거권 문제 등 한국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이 커뮤니티는 일단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생협 운동에 관심이 있거나, 귀농을 통해 지역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도 있지만, 서로의 욕망과 지향점은 매우 다양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각자 다른 조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모여 살면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는 이 과정이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 함께 이 작은 커뮤니티를 통해 이렇게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내 자신과 이 사회에 증명해내고 싶다. 무엇보다 세상의 인정이 아닌 스스로의 인정을 통해서 삶을 기획해 가는, 작은 성취를 꿈꾼다. 우리 모두가 예술에 대한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부여 받은 것도, 이 게임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예술계의 인정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언어와 전략을 익히는 것 또한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미술인’으로서 우리 내부로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미적 언어와 힘, 그 의미를 신자유주의는 매우 빠르게 전유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예술을 둘러싼 거창한 구호나 현실의 변화 가능성 따위를 믿지 않는다. 다만, 근대적인 ‘개인의 신화’에 함몰되는 것이 아닌 개인(이자 직업군으로서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어떤 연대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을 통해 결국에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예술적 성취와 같은) 직업적인 소명과 분리되지 않는, 삶과 예술이 지속적으로 상생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나의 소박한 상상이 지나치게 이상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당분간의’ 현실 속에서 그릴 수 있는 가능한 꿈이며, 여기에 함께할 동료들을 언제나 환영한다.
“이크, 봄을 떰핑하는구나!” > 이은우·작가 “머 어데 빈자리가 있어야지” “글쎄올시다.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어떻게 해주십사고 무리하게 졸를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면 이담에 결원이 있다든지 하면 그때는 꼭……” 마음속으로 교사를 깔보지 않는 학생치고 똑똑한 학생은 없다. 나는 감히 이렇게 단언한다. 여기에는 ‘어른에 대한 반항’의 의미가 담겨 있다. ‘불결한 어른’이라든가 ‘어른은 믿을 수 없다’든가 ‘어른에게 속지 마라’는 말도 포함된다. “결원이 그렇게 나나 어데…… 그러고 간혹 가다가 결원이 난다더래도 유력한 후보자가 멫십 명씩 밀려 있어서……” “네. 그렇습니까” “거참 큰일들 났어. 저렇게 좋은 청년들이 일거리가 없어서 저렇게들 애를 쓰니. 그렇지만 내가 늘 말하는 것인데…… 저렇게 취직만 하려고 애를 쓸 게 아니야. 도회지에서 월급 생활을 하려고 할 것만이 아니라 농촌으로 돌아가서…….” 그러나 이런 때야 말로 어른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진정한 어른이 실력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말이다. 눈을 똑바로 떠라. 선생이라고 해서 무엇이든지 다 아는 건 아니다. 게다가 선생은 소년기의 고민을 졸업한 지 이미 오래여서 거의 반은 잊어버렸을 테니 그만큼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저는 그 말씀 잘 못 알어듣겠는데요. 저희 같은 사람이 농촌에 가서 할 일이 있을 것 같잖습니다.” 소년기 그 자체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선생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인생은 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살기 쉬운 것이다. 만약에 여러분의 고민을 진정으로 함께 고민해주는 선생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 선생은 어른과 소년 간의 괴리 속에 혼란을 느끼고 자살할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있나! 가령 응…… 저……” “그렇지만 지금 조선 농촌에서는 문맹퇴치니 생활개선이니 합네하고 손끝이 하얀 대학이나 전문학교 졸업생들이 몰려오는 것을 그다지 반겨하기는커냥 머릿살을 앓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지식 청년들이 모다 그런 인도주의자가 되어집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마라. 어차피 이해 못 할 거라고 토라지거나 반항하지도 마라. 그건 약한 마음에서 나오는 어리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후훗. 선생 따위가 어떻게 우리를 이해하겠어?’라고 생각해버리는 게 오히려 낫다. 그리고 ‘흥, 공부는 해주겠지만, 이해받으려 하진 않겠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 “그래 가지고는 기에다가는 무어라고 쓰느냐 하면 ‘우리에게 향학열을 고취한 놈이 누구냐?’ ……어때?” “좋지!” “유지와 명사의 가면을 박탈시키라고…… 한 멫십 명이 그렇게 데모를 한단 말이야!” “이크! 봄을 떰핑하는구나!” 대충 이런 식이다. 이것이 바로 청춘의 실태다. 최대의 적인 심심함(한가함)과 가난(용돈 부족)을 그들은 즉시 사회와 정치 탓으로 돌린다. 그런데 정치는 이런 대답을 미리 준비해두고 있다. “오오, 한가해서 걱정인가? 그렇다면 옛날처럼 의무병역제도를 다시 도입할까?” 또는 “중국 청년들을 한번 봐. 그들처럼 자네들 손으로 사회를 개혁하는거야. *이 글은 미시마 유키오의 《부도덕 교육강좌》(1959)의 <선생을 무시하라. 속으로만>과 <젊은 혹은 청춘>, 그리고 채만식의 단편 <레디메이드 인생>(1934)을 조합하여 작성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예술병 > 함영준·칼럼니스트 창작의 길은 흔히 외롭고 험난한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유독 험난한 창작 과정을 거치는 예술가들이 있었다. 자아를 모두 던져버리듯, 캔버스에 완전히 감정을 이입한 채, 마음을 모두 열어 재현하는 작업을 해 온 작가들이 실제로 (100년 전에는) 꽤 존재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소년 소녀들에게 위인전을 통해 유명짜하게 알려졌다. ‘여기 이토록 훌륭한 작가가 굶으면서 예술혼 하나만을 믿고 견뎌서 성공했답니다.’ 그리고 작가라는 사람들의 간증, 아니 강연이 이어졌다. ‘제가 소싯적에 돈이 없어서 집에서 학교까지 먼 거리를 걸어다녔는데… 소주에 밥을 말아먹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예술에 눈을 떴답니다. 아멘.’ 그러면 대중들은 이제 생각하게 된다. ‘예술가란 저런 거구나. 술도 참 좋아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예술가는 배고픈 거구나. 고통을 인내해야 좋은 예술이 나오는구나.’ 이렇듯 예술가들의 신화는 떠들기에 참 알맞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문득 어떤 것에서 예술가로서의 영감을 받고 긴 세월 동안 갖은 고생을 겪고 (운발은 살짝 빼놓고) 실력으로 고생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고 결국 성공하는 이야기는 대중의 눈물과 공감을 자아내고 ‘예술가’가 되겠노라 선언하고 부모님과 사투 끝에 예술을 전공하게 된 수많은 지망생들의 현실을 위안한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좋은 예술가가 되는 것과는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 좋은 예술가가 되려면 그러한 현혹적인 신화에 귀를 기울일 시간에 차라리 자기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하는 것이 낫다. 여기서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의 성공을 미화하고 싶은 졸부 스타일의 예술가를 굳이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실제로 좋은 예술가일 확률은 거의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사람들. 그냥 그러라지. 뭐. 하지만 문제는 다른 것에 있다. 실제로 예술병에 걸려 고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된 수많은 젊은이들은 여기저기서 착취당하고 있다. 손꼽히는 유명 갤러리에서 그림을 판매한 한 후배는 그림값을 정산 받는 대신 차후 그룹전의 기회를 제안 받았다고 한다. 최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한 인디 뮤지션은 작년 한 해 20회 이상의 공연의 대가로 총 8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페스티발을 기획하는 한 업체는 88만원도 채 되지 않는 임금을 지급하면서도 매일 매일의 야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퍼포먼스에 자신의 제자를 동원하고 출연료는 뒷풀이 음식으로 정산하는 교수들의 관행은 아직도 남아 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조차 3개월 인턴에 3만원이 조금 넘는 일당으로 버젓이 구인공고를 내고 있다. 지망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를 해야 할 판이다. 이러한 불합리가 가능한 것은 ‘예술은 원래 배가 고픈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관념이 점점 공고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예술’하는 ‘가족’같은 사람들이니까 이해해달라는 식이다. 그리고 정당한 대우에 관해 조금이라도 민감하게 굴었다가는 예술가가 돈을 밝힌다는 타박만 돌아온다. 간혹 판이 좁기 때문에 소문이 날거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예술’을 하는데 힘들 거라는 협박조의 충고도 듣게 된다. 그런데 우리 가련한 예술가 지망생들은 이 모든 시련들을 어릴 적부터 참인지 거짓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문신처럼 머리 한 구석에 새겨진 예술가 신화를 통해 굴절시켜 이해한다. ‘그래. 아직은 힘들지만, 이런 시련쯤이야… 빈센트 반 고흐는 귀를 잘랐다잖아?’ 하지만, 반 고흐는 정신질환으로 귀를 자른 것이지, 예술가로서의 시련을 겪기 위해 귀를 자른 것이 아니고, 젊은 시절을 굶다 보면 독기와 아집과 알콜중독만 생긴다. 그리고 장사가 안 되면 장사를 접는 것이 맞고 월급을 못 주면 사람을 쓰지 않는 것이 맞다. 법보다 선행하는 예술가의 길을 가려거든, 자기 혼자 구속되는 퍼포먼스를 권해주고 싶지, 함께 굶어 죽는 길을 가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이 둘씩이나 죽었으니 정치권에서는 이미 예술가를 위한 복지정책을 펼치겠노라 법안을 상정하고 난리도 아니다. 아직 국민의 관심이 남아 있을때 빨리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급하게 접근하다보니, 정치권 특유의 아저씨스러운 몰이해 덩어리 법안이 등장하게 생겼다. 물론 예술가에게 창작을 독려하는 국가 차원의 지원을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약자나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특수한 업종에서 일하는 전문직 노동자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지원으로 이루어져야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예술병’에 대한 단호한 처방, 즉, 이 사회가 예술가의 지위에 대해 어떠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우선 점검하는 일이다. ‘재능기부’라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말을 만들어 내는 세상 아래에 살고 있다고 해도 사회구성원,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추구해야 하는 길은 아니다.
나는 작가인가? 무엇을 원하는 작가인가? > 이상현·작가 학부를 졸업한지 3년이 지나고,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시작했던 일들이 먹고 살기 위한 일들로 변화하고, 과연 앞으로 작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란 의문과 고민을 막 가지게 된 지금, 이 글을 쓰는데 있어 적잖은 망설임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나에게 일반적인 ‘작가’라는 타이틀은 사실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에게 되물어 보아도 확신보다는 의문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다만 나 스스로가 다짐하고 되뇌기 위해 써보려고 하니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하며 읽어 주면 감사하겠다.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몇 번의 전시를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볼 수가 있었다. 대부분이 좋은 경험들이었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의외의 고민이 점점 깊어졌다. 또래 작가들과 보냈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자면, ‘작가가 되려는 우리 세대가 기존 작가군의 커뮤니티에 편입하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잘 나가는 작가나 선배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이 작업을 하는 것 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물론 나 또한 이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선배나 윗세대의 작가들과 어울리기 보단, 우리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무리들과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와 주변 또래들의 행동들은 실망스러웠고, 작업을 통해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앞섰으며, 남들과의 비교를 통한 같잖은 우월감, 혹은 열등감에 괴로워하며 조급해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생각들이 되려 작업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작업의 진정성에 의문점을 생기게 해 심각한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다. 요즘에 들어선 자위에 가까운 합리화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다짐일지는 모르겠지만 꼭 메인스트림에서 빛나야 작가로서의 만족을 얻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먹고 살기위해 혹은 열등감 때문에 작업의 끈을 놓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작가인지 명확하게 인지하는 ‘작가’로서 생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생각하며, 또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Coda : Mate by My Side > (김)소영·문화연구, 전시기획자 한동안 나는 내 삶이 엉터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네 삶도 엉터리라는 것에도 괴로워 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공통의 삶’을 살고 있는 타인들을 ‘옆 사람’이라 불렀다. 나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기획전인 <옆 사람>(갤러리175, 2010. 9. 27~10.14)은 바로 이렇게 정서적 정치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 심리적인 소속감을 나눌 수 있는 그러한 사람(Mate by My Side)과 어떤 느낌의 공동체를 이뤄 보려는 시도였다. 나는 나 자신의 불확실함에서 출발하여, 타인의 삶의 불확실함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여럿인 그들, 옆 사람과 함께 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미술에 있어, ‘우리’라는 대명사는 위험하고 불편한 것이 되어 버렸다. 너와 나를 ‘우리’로 묶는 모든 행위가 불가능해 보였고 이런 상황에서 ‘함께’를 이야기하고 싶은 이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나는 우리라는 기존의 감각 위에 또 다른 ‘우리의 감각’을 빗금 치고자 한다. 그리고 이때에 필요한 것은 느슨하거나 나이브한 관계-맺기가 아니다. 일시적으로나마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상태, 타인을 통해 내가 훼손되고 폭발하는 상태, 서로에게 끊임없이 개입하고 충돌하는 그런 상태, 즉 ‘사랑의 상태’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미술은 여전히 ‘잘못된 사랑’을 용인해 주는 것 같다. 이렇게 ‘관계’와 ‘불화’가 공존하고, ‘대화’와 ‘소음’이 교차하는 사랑의 장소에서 그들과 (불)편한 우정을 나누고 싶다. 나에게 ‘큐레이터’란 한 음절도 버거운데, ‘독립 큐레이터’라는 말은 더욱 낯설게 들린다. 이 두 음절의 알 수 없는 직함은 환경이나, 물리적 여건의 부실함과 함께 소속의 부재를 느끼게 한다. 그렇다.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가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 나는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거다. 그런 한 사람으로서, 동시대 미술에서 담론의 부재나 비평의 빈약함 같은 커다란 문제는 나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거시적인 층위에서 나의 고민은 “나는 어떤 공동체의 일원이며, 누구의 동료인가” 내지는 “누가 나의 ‘확보된 독자’인가”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미술계의 일원이며, 작가의 생산적 동료로서 ‘풋내기 젊은 기획자’는 구체적으로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지, 누구와 생산적인 토론을 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고민은 미술계라는 전체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일과 병행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한 선배 기획자의 말처럼, “이제는 미술 공동체에서, 더 이상 적과 싸우기 위해 나와 닮은 친구를 확보하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다시, 옆 사람 곁에 선다. 지금 나는 기획자도, 큐레이터도 아닌 이들의 ‘확보된 독자’일 뿐이다.
잉여론: 잉여로운 삶>윤사비·작가 사실 나는 소위 ‘미술계’라는 곳에 별로 바라는 게 없다. 따지고 보니 미술계뿐 아니라 지난 내 짧은 시간동안 바란 게 별로 대단치 않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로부터 도망가는 걸 바랐던 것 같고, 도망에 성공한 고교시절에는 바라는 게 아예 없었다. 대학 때는 장학금을 바라고 피똥을 조금 쌌던 기억이 있고, 졸업 후에는 딱히 한 것도 많지 않았기에 바란 것도 별로 없었다. 그 후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났다고 나도 작가가 되었는데, 작가가 된 지금도 바랄 것이 생각이 안 났다. 그런데 얼마 전 고 최고은씨의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있었던 논쟁도 조금 보았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예술인 복지 법안 공청회가 열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유능한 젊은 예술가의 죽음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반성과 재발 방지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본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지만, 이건 뭔가 내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난에 의해 좌절을 맛보는 능력 있는 젊은 사람들이 어디 문화예술 분야에만 국한된 일인가라는 의문과 현재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를 특별하게 보호해 줄 필요가 있는 ‘중요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의문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예술가 역시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고 본다. 왜 예술가라고 해서 좀 더 특별한 복지 정책이 필요한가. 이 글을 쓰다 보니 바람이 딱 하나 생각났는데 그건 우리 사회가 보편적 복지 정책을 통해서 좀 더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가도, 취업 준비생도, 그리고 치킨집 사장님까지도 포함한 안전망이길 바란다. 예술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예술가의 가치를 잘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전망 안에서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좀 더 늘여서 누구나 각자 자기 방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잉여스러운 짓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흔히들 말하는 돈 쓸 수 있는 ‘여유’가 아니고 정말 잉여잉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디씨인사이드 같은 인터넷 공간에 사람들이 싸지른 만화가 많아지고 사진이 많아지고 동영상이 많아지고 ‘뻘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사진합성, 비디오합성, 정치비평, 군사비평, 기술비평, 음식비평 등등이 많아지고 힛겔(편주: 디씨인사이드 내 히트 갤러리)에 올라오는 작품들의 수준이 높아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흐르고 그것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엄청 높아져서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흥미롭게 하는 것” 따위의 말로 사람들에게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을 강요할 필요가 없어지는 상황이 왔으면 좋겠다.
-art in culture 2011년 4월호 <암흑물질>
Ho
2011/04/2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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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경험 & 회화의 감각"_이정민
 이성의 기능_130x162cm_캔버스에 먹 아크릴_2008 작가와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 나와 작가는 먼저 토시키 오카다의 공연을 봤다. ‘몸짓’과 ‘말’이라는 두 신체적 요소 간의 불협화음을 유연하게 표현한 그 공연은, 감각에 입각해 비언어의 영역을 탐색한다는 측면에서 ‘감각의 위치’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었던 이정민의 그림들과도 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오카다의 공연이 형식적인 면에서 감각의 영역을 다루었다면, 내용 면으로는 한 사무실에서 퇴직하는 사원의 송별회 메뉴를 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공연이 끝난 후 우리 역시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인사동의 일본식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정민의 그림에는 케이크, 아이스크림, 꼬치 등 유독 음식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캔버스에 그려진 음식들은 전혀 먹음직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2007년에 열었던 개인전의 제목을 이상식욕항진증을 가리키는 ‘빈지-퍼지 신드롬’이라 지었다.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 식욕이 비정상적으로 지속되거나 특정 음식에만 유난히 식욕이 당기는 이 증상은, 정신과 신체의 불협에서 파생된 우울증에 속한다. 이정민의 그림은 존재의 상대적 혹은 절대적 결핍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존재론적 배고픔을 자각했을 때, 그 허기를 ‘감각’으로 채우려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정민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처음 읽었을 때, 그림에 대해 그가 그동안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것을 마치 저자가 대신 설명해 주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정민이 2009년 열었던 개인전의 제목을 ‘감각의 위치’라 짓고 ‘신체와 정신의 작용’에 대한 일련의 작업들을 선보인 주된 이유도 바로 ‘감각’에 있을 것이다. 한편 동양화를 전공한 이정민은 서양에서 세잔이나 베이컨의 회화를 통해 설명되던 ‘감각’의 문제를 전통 동양화론의 ‘사의(寫意)’에 견주어 보기도 한다. 그는 과거의 한 인터뷰에서, 불교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5가지의 마음 작용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눈 귀 코 혀 피부의 감각을 통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 그것이다. 여기에 잠재의식(6식)이나, 유전자에 기억된 인류의 경험(제7말라식) 등을 더해 마음의 심층을 탐구하는 다양한 기준을 열거한 바 있다. 서두에 소개했던 공연에서 ‘몸짓’과 ‘말’이 완벽하게 일치를 이루지 못하듯이, 이정민은 감각적 이미지를 시각적 형태로 ‘회화화’하고자 할 때 화면 위에서 순간적인 붓끝의 움직임으로 예기치 못했던 꼴을 이루는 순간이야 말로 회화 작업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 이정민이 회화의 감각에 대해 탐구하면서 동서양의 철학적 흐름을 골고루 참조하듯, 그것의 표현 방법 역시 동서양을 가로지른다. 2003년의 첫 개인전에 소개됐던 작품들만 하더라도, 대부분 장지에 전통 동양 채색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왠지 갑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길을 떠나는 친구가 쓰던 아크릴 물감을 주었고, 재미삼아 아크릴과 먹을 섞어서 그려 봤다. 종이 대신 캔버스로 바탕도 함께 바꾸어 봤다.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경험이 쌓이면서 먹과 아크릴의 서로 다른 입자가 묘하게 섞이면서 드러나는 시간성의 매력을 화면 위로 끌어 올렸고, 준법에 있어서도 그만의 노하우를 쌓아 갔다. 먹을 써서 윤곽선이 강조되지만, 그 위에 아크릴을 덧발라 구상적이지만 구상회화는 아닌, 그렇다고 추상회화도 아닌 모호한 그림이 나왔다. 먹과 아크릴물감 혹은 유화물감을 함께 사용하는 이정민의 독특한 양식을 두고 어떤 이들은 ‘동양화라는 특정 장르임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가?’ ‘오리엔탈리즘을 과도하게 의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식의 색안경을 끼고 본다. 이에 이정민은 2007년 개인전을 마치고 나서 <이것은 동양화가 아니다: 동양화, 한국화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라는 글로 받아쳤다. 이정민이 진짜 동양화에서 가져 온 것은 먹이 아니라 ‘정제’의 미덕이다. 그는 “동양화의 필법은 감정을 즉자적으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정제되어야 한다. 파격도 그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동안 이정민이 회화의 본질 안에서만 머물러 있었다면, 최근에는 훨씬 더 넓은 영토로 ‘감각의 위치’를 확장시키고 있다. 화실 밖으로 나와 세상과 마주하며 정제보다는 소통을 꾀하려는 것이다. 2009년부터 그는 옥인아파트 철거를 계기로 동료 작가이자 남편인 진시우, 그리고 김화용 육킹탄 조은지 등과 함께 ‘옥인컬렉티브’를 결성해 상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각자 개인 작업을 하던 이들은 “따로 또 같이”라는 모토 아래,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 공간 속에서 탐험과 연구, 침투와 개입을 시도했다. 한편 이정민은 가장 최근에 개최한 개인전 <옥상 3부작>에서 그림뿐만 아니라 다양한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는 용산 참사를 그린 ‘1부-회화들’, 옥인컬렉티브 활동 중 발견한 일제 구식 레코드에 담긴 음악을 뮤지션 최태현과 함께 변주한 ‘2부-옥상을 위한 소곡’, 드로잉과 텍스트, 사진, 오브제 등으로 이루어진 ‘3부-엄마의 옥상정원’으로 구성되었다. 옥인컬렉티브 활동은 그렇다 쳐도, 화가의 개인전에서 설치 작품을 보자니 사뭇 당혹스러웠다. 당시 열렸던 작가와의 대화에서 나는 이 전시를 두고 “번외편”이라며 말문을 열면서, <옥상 3부작>전에 나온 설치 작품들을 화가의 ‘일탈’로 봐야하는 것인지 ‘노선 변경’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작가는 화가의 ‘경험’이라고 답했다. 결국 이정민은 화가인 것이다. 달리 보면 <옥상 3부작>전은 이정민이 옥인컬렉티브 활동을 하면서 뇌리에 꽂혔던 이미지를 다시 화가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전시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용산참사와 같은 사회적인 이슈를 ‘옥상’이라는 은유로 풀어내는 것은 화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3부로 나뉜 작업을 잇는 동그란 공은 다시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 나오는 “한 끝에서 또 다른 한 끝으로 가며 틀 밖에서 시작하고 틀 밖으로 쫓아가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정민은 여전히 ‘감각의 위치’를 묻고 있다. -art in culture 2011년 4월호
Ho
2011/04/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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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컬처@온라인
아트인컬처가 온라인 소통 채널을 새롭게 열었습니다. 1. 기존 홈페이지 www.artinculture.kr 에서는 매달 잡지의 컨텐츠가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됩니다. 2. 별책 정보지 <art와>를 온라인으로 전환, 블로그 형식으로 운영됩니다. 프리뷰와 뉴스 등의 정보를 신속하게 포스팅합니다. www.artwa.kr 즐겨찾기에 추가해 주세요. 3. 페이스북도 열었습니다. 친구 등록 및 "좋아요"를 팍팍 눌러 주세요. 4. 트위터를 통해 스마트폰 이용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artinculture 를 팔로우해 주시고, 또한 리트윗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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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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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유람기
공교롭게도, <코펜하겐 컨템포러리>의 초청으로 덴마크에 도착한 날은 광주비엔날레의 프레스프리뷰와 에르메스미술상 시상식이 동시에 열리던 날이었다.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날은 전국에 아주 심한 폭우가 쏟아졌고, 국내 주요 미술 관계자들은 광주에 간 사람과 서울을 지킨 사람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만약 기자가 한국에 있었다면 어디를 갈까, 꽤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각, 기자는 덴마크의 아름다운 풍광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코펜하겐 컨템포러리>에서 제공한 밴에 몸을 싣고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다. 덴마크에는 비엔날레가 없다. 그러나 예페 하인, 올라퍼 엘리아슨 등의 대표 작가를 위시해 동시대 미술계 메인스트림으로의 합류를 꾀하고 있다. 덴마크는 비엔날레 대신 일종의 ‘아트 위크’와 같은 <코펜하겐 컨템포러리>를 개최한다. <코펜하겐 컨템포러리>는 덴마크 관광국 ‘원더풀 코펜하겐’과 코펜하겐아트인스티튜트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2008년부터 매해 열리고 있다. 올 행사가 개최되는 9월 2일부터 5일까지 4일 간 코펜하겐의 주요 미술관 및 갤러리의 전시 오프닝이 한꺼번에 열린다. 따라서 이곳에서 봤던 인사들을 또 다시 저곳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자연스레 얼굴을 익힐 수 있다. 또한 홍보 활동 역시 관광국 ‘원더풀 코펜하겐’에서 통합적으로 진행, 서울 뉴욕 베를린 헬싱키 봄베이 등에서 온 기자를 한데 모아 시간대 별로 가이드투어에 참여시킨다. <코펜하겐 컨템포러리>의 공식 전체 오프닝 파티가 열린 장소 장소는 IMO, 닐스스터크갤러리, 갤러리니콜라이왈러, 코펜하겐아트인스티튜트 등의 현대미술 기관들이 들어서 있는 옛 칼스버그 양조장 지구였다. 특히 이곳에 위치한 코펜하겐아트인스티튜트의 대표 토벤 센트는 <코펜하겐 컨템포러리>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코펜하겐퍼블리싱’을 조직해 1년에 한 번씩 《New Danish Art》를 펴내 덴마크의 신진작가들을 한데 모아 소개해 온 덴마크 미술의 주요 인사다. 한편 덴마크 최대의 주류회사 칼스버그는 <코펜하겐 컨템포러리>를 포함한 주요 미술관 스폰서에 빠지는 일이 없을 정도로 현대미술 분야에 막강한 지원을 보내고 있다. 덕분에 술 떨어질 걱정 없이 새벽 3시까지 흥겨운 파티가 이어졌다. 오프닝 파티를 마친 다음 날 아침부터 투어 강행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립 미술관인 덴마크내셔널갤러리를 시작으로, 샬롯텐버그미술관 같은 사립 미술관이나 일종의 대안공간 성격을 지닌 원더랜드아트스페이스와 피프스플로어, 그리고 갤러리포슈 데이비드라이즐리갤러리 미카엘안데르센갤러리 크리스티나윌슨갤러리 V1갤러리 등의 상업 화랑까지 골고루 둘러 볼 수 있었다. 이번 투어의 백미는 역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의 하나로 정평이 나 있는 루이지애나미술관이었다. 코펜하겐에서 1시간 가량 떨어진 훔레벡 지역 바다가 펼쳐진 언덕에 자리한 루이지애나미술관은 1958년 컬렉터인 크누드 W. 옌센이 설립한 곳이다. 특히 미술관 내 조각공원은 덴마크 특유의 아름다운 자연 조건과 현대미술의 이상적인 만남을 제시하고 있다. 루이지애나미술관에는 1945년 이후 현대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로버트 라우센버그, 루이스 부르주아 필립 거스톤, 모리스 루이스 등의 거장부터 토마스 데만트, 조나단 메세, 줄리 메레투 등 최근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까지 3,000여점이 넘는 소장품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이우환의 작품도 소장되어 있으며, 핀란드에서 거주하는 한국 디자이너 아무 송(컴퍼니)의 <레드 드레스>도 이곳에서 전시된 바 있다. 현재는 소피 칼의 개인전과 기획전 <뭉크 이후의 워홀>이 열리고 있었다. 또한 안젤름 키퍼의 개인전은 오프닝을 며칠 앞두고 설치 중이었으나 기자들은 미리 작품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기자단은 코펜하겐 외곽에 있는 아티스트레지던시스튜디오에도 방문했다. 이곳은 한적한 숲 속에 있어 세계 곳곳에서 온 작가들이 편안하게 휴식하면서 작업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또한 이러한 환경을 십분 활용, 입주작가를 중심으로 조각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 그곳에 입주해 있는 니카 오블락&프리모즈 노박은 2005년 쌈지스튜디오에 입주했던 작가라서 더욱 반가웠다. 이들은 슬로바키아 출신의 부부 작가인데, 그 동안 아기를 낳아 레지던시에서 육아와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기자가 애초에 기대했던 덴마크 신진 작가의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옛 도축장 지구와 ‘오버가든’이었다. 2007년 옛 도축장 지구에 작가 예페 하인과 그의 동생 레르케 하인이 문을 연 레스토랑 겸 클럽 ‘카리에르’는 댄 그래함, 올라퍼 엘리아슨 등 작가들이 인테리어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 작가들의 정서적 구심점인 카리에르는 비정형적인 프로젝트를 실험하는 장이자, 동명의 정기간행물도 발간해 냄으로써 덴마크 미술의 비전을 발신하는 곳이다. 한편 오버가든은 대안공간의 성격을 띤 기관 중 가장 큰 규모와 체계적 프로그램을 갖춘 곳으로 덴마크의 신진 작가를 프로모션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코펜하겐 컨템포러리> 주간에는 부대 행사로 ‘인스티튜션에서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주디스 슈와츠바르트 박사가 모듈레이터로 나왔고, 스웨덴 인근의 말뫼에서 온 제이콥 파브리치우스 말뫼미술관장, 마크 슬라덴 샬롯텐버그미술관 디텍터가 패널로 참가했다. 사실, 이 글의 서두에 꺼냈던 말은 다른 기자들이 한참 비엔날레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혼자만 좋은 구경했다는 자랑이 결코 아니다. 3개의 비엔날레가 동시에 열리는 우리의 상황에서 덴마크의 ‘상생과 공생’의 미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경우 “A비엔날레에 참여하면 B비엔날레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작가에게 선택을 강요하거나, 개막식에 지자체장 의전 준비, VIP리스트에 열을 올리는 등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오히려 덴마크는 하드웨어 기반이 약한 데 비해 컨텐츠 확보와 실리를 추구하는 ‘통합’의 전략으로 스칸디나비아 미술의 선두를 차지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rt in culture 11월호

Ho
2010/12/26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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