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쿤스트할레에서 김승덕과 프랑크 고트로가 한국 현대 미술전시를 잘 만들었다. 한국 정부나 국내 기관의 어떤 도움 없이 쿤스트할레에서의 쿠사마 야요이 전시의 성공으로 미술관측은 이들에게 전시를 의뢰했고 1년여 준비 기간을 거쳐 전시를 완성했다. 근자에 들어 한국 현대미술 해외전이 많아지고 있다. 세계 경제 규모 11위라는 고속 성장 덕분에 한국미술 또한 3백년 만에(정조 시대 이후 처음으로) 미술 르네상스의 문턱에 와 있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시장이 춤을 추고 젊은 작가들의 작업 조건이 나아지고 국제화의 기회도 많아졌다. 1990년대 후반 이래 정부가 주도하거나 지원하는 미술 행사가 많아지고 규모도 점점 커간다. 당연히 정부 주도의 해외 기획전들이 늘어간다. 하지만 큐레이터쉽이 잘 발휘된 기획전은 그다지 보기가 쉽지 않다.
한국미술을 조망하는 다성적인 눈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에 김승덕은 시원 솔직하게 한국을 이방인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는 오래 전에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체류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느 나라에 살며 활동하건 항상 실험적인 작가와 가까이 하고 전시를 보고 만드는 일로 살고 있다. 스스로 고정된 중심에 머물지 않으려는 순수한 열정만이 새로운 예술 의지를 가능케 해준다. 유럽의 몇몇 진취적인 대학의 교육 현장에 대해 연구하려고 동료 교수와 여행하던 중, 이 전시의 오픈을 보고 싶어 비엔나로 날아갔다.
또한 뜻 깊은 추억이 하나 있었다. 제2회 광주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여했고, 2005년 브뤼셀에서 자신의 대규모 기획전 개막을 앞두고 과로로 사망한 하랄드 제만과 꼭 10년 전 첫 만남이 이뤄진 장소가 비엔나였고, 그의 전시를 생전 처음 보게 된 것도 바로 이 한국 미술전이 열리는 쿤스트할레에서였다. 명철한 인문학적 사유와 예술가로서의 큐레이터 이미지를 우리 시대에 확고히 심어 놓았고 시각예술의 ‘다성적’ 전시의 방법을 미리 예시했던 제만의 일련의 역사전들은 우리의 시각적 인식을 역사에 대한 인습적 사고에서 얇게 벗겨내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우리 자신의 육신과 정신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 점은 전시를 ‘다양체’로 만들어가는 제만 특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다양체를 만드는 법은 쉽지 않다. 일단 소통과 관련한 어리석음(Communicational Stupidity),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 클리쉐 등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매번 공중 낙하하는 것과 같다. 다양체는 바둑 게임처럼 단 한 번도 같을 수가 없다.
‘유연성의 금기(Elastic Taboos)’라는 제목으로 인류학적 뉘앙스를 풍기는 이 전시는 한국 사회 자체가 ‘반복 강박’에 붙잡혀 있고, 거기서 일탈하려는 심리적 메커니즘과 미술이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한국미술을 요리 재료로 한국 사회의 터부, 심리적인 반복 강박의 주름들을 더듬듯이 일했다. 한국은 유난히 주름이 많은 나라다. 단순성이나 일반성으로 환원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비순수하게 복합적이고 여러 번 여러 방식으로 사람 사이, 지역 사이, 나라 전체가 복잡하게 접혀 있다. 전통 가옥 구조에서도 안과 밖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이 전시는 여러 세대, 다양한 매체,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작가들을 포괄했다. 월드컵 축구 당시의 환호성이 들려오듯 티셔츠에 새겨진 ‘Be the Reds’라는 문귀가 도록 커버에서 보인다. 그러나 이 전시는 외국인 관객을 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전략상 관광 취미로 관객을 유인하지만 그 안은 온통 예기치 못한 사회적 개인적 주름들, 긴장들, 욕망들로 가득차 있고 전시 전체가 퍼포머티비티의 활력적인 공간이 되었다. 우리 각자는 어릴 때 이해하지 못한 채 경험한 것이 성장한 뒤에도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이 반복 메카니즘은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과거와의 관계에 있어 억압된 것이며 무의식 중에 되풀이 되지만, 자신은 그 원인이 현실적 상황에 있다고 판단해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때까지 계속 반복하는 특징을 보인다.
반복적 강박으로 안내하는 심리 지도
오랜 땀과 노동과 진보적인 의식이 배어 있는 신학철의 성실하고 힘찬 한국형 ‘마초’ 회화는 냉전 치하의 한국 사회의 많은 거부 감정들, 억압과 타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주먹에 피가 맺힌 채 구석에 주저앉아 반복적으로 곡을 하는 백현진의 퍼포먼스, 바닥에 놓인 머리의 가발에서 쉬지 않고 솟아 나오는 (눈)물방울이 대야에 고이는 작품(이슬기), 발목이 묶여 제자리를 맴도는 닭의 퍼포먼스(이강소), 교복을 입고 있는 사춘기 소녀들과 평균적인 한국 아줌마들의 심리적 강박(오형근),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의 반복 강박과 늘어가는 뒤틀린 주름(김홍석) 등 일종의 정신적 진료 혹은 신경 시스템의 재정비에 가까워 보이는 작업들이 많다.
이들의 전시는 예컨대 아상블라주 지도이다. 그것은 종종 맥락을 요구하지만 그것을 단지 가르침- 배움의 근거로 삼아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관객들에게 설명하고 판단하고 해석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각적 도주를 돕는 지도이다. 행복을 위한 유토피아를 위한 도주가 아니라 좀더 높은 차원의 건강을 위하여 도망친다. 도주를 위해 지형 지물(맥락)을 관찰하고 사방으로 길을 터줄 때 즐거움이 넘쳐나고 도주 방식 속에서 유머와 놀이가 돋아난다. 맥락은 길가는 자의 피로를 풀어주는 쉼터 같은 것이면서 ‘번지 점프’를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길가는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심리 지도가 곧 새로운 현실을 발생시킬 때, 보다 절대적 위상을 획득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통하는 의미에서의 ‘절대’는 아니며 전지적이고 초월적인 시점에 머리를 베어 가면서 계속 ‘사이’로 빠져 나가는 일종의 배반 행위인 셈이다. 멀리 갈수록 전반적으로 풍경은 사라지고 공기는 희박해진다. 박이소의 〈오공계(五空界)〉는 지극한 희박성의 침묵 언어로 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그것은 각자 작업들의 도주선들이 무한이라는 바깥으로 나가게 해주는 문이다. 전시장의 문턱에 그의 멍한 작업이 아주 기능적으로 잘 놓여 있다.
비엔나라는 도시는 20세기 문턱에서 유럽 백인 문화와 지성사에 있어 안과 바깥이 통하는 문이었다. 문화적 성감대와 같은 비엔나는 전통 사회의 오랜 인습과 금기로부터 제각기 왕성한 도주선을 타고 달아나는 행동주의 모더니스트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예민한 실험 무대였고, 20세기 지성과 사회 전체를 바닥(욕망)과 위(사고)에서 부터 흔들어버린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의 도시이기도 하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 안의 보다 많은 주름들, 안보다 더 안, 바깥보다 더 바깥을 탐사한 위험스런 모험가들의 도시. 또한 두 번이나 시험에 낙방하여 예술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히틀러가 청년 시절 유태인 심사위원들에게 분노의 경고장을 보냈던 도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이를 16명이나 낳은 관광의 도시를 이리 저리 거닐어 본다. 느닷없이 여기저기 포스터가 눈에 띈다. 수영복 차림의 탤런트 김자옥이 활짝 웃으며 젊은 시절 화창한 여름 바닷가의 모래밭에 양산을 쓰고 비스듬히 누워 있다. 전시 포스터이다. 신선한 관능과 이국 취향에 호소하는 이미지는 거리에서 관객의 반복 강박의 심리를 이용하여 눈길을 낚아채는 미끼다.
작가와 작가, ‘우정 어린 적’의 관계
이 전시에는 지난 60년 동안 한국의 대중 스타들을 찍어온 광고 사진의 대부격인 김한용(88세)을 비롯해 20대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양한 세대들이 참여했다.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공간, 다양한 내러티브, 혼성 매체들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다원형 전시가 되었다. 다원형은 한마디로 ‘군혼’이다. 다수와 결합하면서 예측할 수 없이 변해가는 상태. 작품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 상대에게 적응해야 한다. 이질적인 작품들이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 공존하는 것은 동일 지평에서 A와 B 사이에 C가 발생하는 형식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계속 파생되고 감도의 지대가 더욱 넓어져 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시간의 폭발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관객들은 전시장 안에서 다양한 감각들의 문지방을 넘게 되고, 그것은 놀라움을 제공한다. 박서보의 매끄러운 페인팅 곁으로 젊은 여성 작곡가 버블리피시(김해영)의 사운드 작업이 끼어들었고, 신학철의 영웅적인 제스처의 그림이 최정화의 모조 루이뷔통 마크 벤치와 마주하며 우정 어린 적 (Friendly Enemies, 여러 분야, 5인으로 구성된 비정규 잡지)의 관계는 서로 기호를 교환, 민중 그림과 자본 시장이 화해한다. 김홍석의 ‘찌그러진 LOVE’ 조각과 LA에 거주하는 한국인 2세 작가 스티븐 곤타스키 조각이 오형근의 소녀 연작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써니킴의 낡은 벽지 모양의 그림을 배경으로 독특한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 뒤에서는 남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이슬기의 센슈얼한 거대한 도깨비 방망이가 관객이 접근하면 북을 치며 소리를 낸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여행자.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생각해 온 이우환의 간결한 원 스트로크의 회화 작품이 이강소의 퍼포먼스 재현 작품, 회화들과 한 공간에서 출몰하면서 이상스런 유머가 생겨나고, 가발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이슬기의 초현실적인 괴이한 오브제 뒤에는 남성적인 큐빅 건축물 이미지를 중심으로 다소 환각적인 제스처의 풍경이 그려진 이누리의 페인팅이 걸려 있다. 작품들은 각기 자신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고, 서로 간에 간섭하고 섞이면서 긍정적인 ‘우적’의 공간을 열어주고, 관객들에게, 참여작가들 또한 기획자들 자신에게 어떤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기획자들은 영화감독 두 명을 초청하여 별도의 상영실을 마련했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봉준호, 서강대 철학과를 나온 박찬욱의 작품이 미술관 전시에서 선을 보였다. 오프닝 날 상당히 많은 관람객이 왔고, 두 기획자의 성실하고 진지한 발표를 오랫동안 그냥 서서 경청하는 비엔나 관객의 수준에 한국 참가자들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art in culture|2007년 6월호|글|이영철

광고사진가 1세대인 김옹께서는 셀카를 위해 어안렌즈를 사용한다.









